THEME TALK

나와 아르프 교수님, 그리고 브루크너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이번 연재는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을 다룹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공연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아티스트들의 목소리를 관객분들께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기획했습니다. 예술가들의 인생에서 크게 힘이 되었던 공연이나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공연을 여러분께 소개함으로써 위기 극복에 대한 희망이 독자들에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이번 첫 회에서는 게임 음악을 오케스트라 연주로 선보이는 등 대중과 클래식 음악의 벽을 허물며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온 지휘자 진솔이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 그리고 브루크너 교향곡 8번과 함께한 2013년 여름의 인연을 회고했습니다.

2013년 여름, 독일에서 날아온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나는 당시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 석사과정 유학을 앞두고 입학 합격 서류를 막 받아 든 상태였고, 클라우스 아르프는 만하임국립음악대학 지휘과 교수, 즉 나의 지도교수가 될 사람이었다. 독일 땅을 밟은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터라 모든 것이 낯설고 걱정스러웠던 나는 입학 전에 교수님과 조금이라도 더 친해질 겸 한국으로 돌아와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보러 가기로 했다. 교수님에게 리허설에 참석하겠다고 말씀드리자 다른 지휘자의 리허설을 보는 것은 굉장한 공부가 된다며 가능한 한 매일 오라고 하셔서 날마다 서초동 집에서 경기도문화의전당까지 왕복하게 되었다.

리허설이 끝난 오후, 먼 유럽에서 오신 교수님에게 커피라도 대접하려 하면 아르프 교수님은 “나 한국 돈 많아!” 하시며 씨익 웃으시고는 천 원권, 만 원권 여러 장을 꺼내 맛있는 것들을 잔뜩 사주셨다. 또한 독일어가 정말 초보 수준이었던 내게 학교에 얼른 적응해야 하니 독일어 선생님 역할도 해주시겠다며 절대로 영어로 대화하려 하지 않으셨다. 지금도 여전히 서투르지만 교수님의 배려 덕분에 나에게 정말 큰 벽과 같았던 독일어를 조금이나마 더 빠르게 익히며 적응할 수 있었다.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2013년 불가리아 플로브디프국립오페라오케스트라 지휘를 마치고 함께한 클라우스 아르프와 진솔. ⓒ진솔

아르프 교수님의 지휘로 브루크너의 세계를 접하다

리허설은 당연하게도 영어로 진행되었다. 당시 브루크너 교향곡은 내가 한 번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던 생소하고 어려운 곡이어서 잘 와닿지 않았다. 비슷한 시대의 작곡가들인 말러, 바그너, 그리고 브루크너를 한데 놓고 보면 왠지 모르게 말러가 조금 더 익숙하고 대중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젊은 나에게도 그랬기에 말러의 교향곡 총보를 하나씩 모아두고 나름대로 공부해보곤 했었다. 하지만 브루크너는 여전히 낯설었다. 사실 총보만 비교해보면 약간은 바로크적인 오밀조밀한 구성을 큰 편성에 욱여넣은 말러보다는 브루크너의 크고 견고한 구조물 같은 악보가 더 단순해 보이기는 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브루크너가 조금 더 접근하기 쉬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유행을 따라 말러에 더 쉽게 마음을 주었던 것인지 아니면 동양인의 정서 때문에 말러의 음악 구성을 더 편하게 받아들였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2013년 8월 클라우스 아르프가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연주를 지휘하는 모습(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136회 정기연주회).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하루에 두 번의 리허설로 매일 듣게 되는 낯선 브루크너의 음악이 슬슬 지루해질 때쯤이었다. 리허설에 세 번 정도 참석한 날이었을까? 언젠가부터 음악이 귀뿐만 아니라 몸에 확 감긴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런저런 모티프들에 정이 들었다. 그날, 교수님에게 내가 느낀 브루크너 교향곡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곡과 친해지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하지만 어느새 너무나도 당연하게 익숙해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자 교수님은 브루크너의 매력을 잘 꼬집었다면서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브루크너는 정말 누가 보아도 오르간 연주자답게 오케스트라에 오르간 사운드를 완전히 녹여냈다는 것이었다. 브루크너의 음악은 악보로는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음의 도입과 말미 처리 등이 한국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조금 애매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 쉽지 않다고도 덧붙이셨다.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이 선물해준 귀의 축복

어느새 리허설이 여러 번 진행되고 공연일이 임박했을 즈음엔 수직적으로 강렬하게 풀어내는, 종교적인 듯한 모티프들의 임팩트에 나는 완전히 중독되어 있었다.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의 4악장은 대중에게도 인기가 있다. 나에게 4악장의 도입부는 마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4악장과 같이 흥분되는 분위기로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무언가 경건한 멜로디’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계시 같기도 하고, 전쟁 같으면서도 끝을 알 수 없는 경건함을 준다. 단조로 시작해서 장조로 끝나는 혼용 화음 모티프 덕분인 듯하다. 꼭 어떤 커다란 존재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극복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다.

그때 들었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공부하며 들었던 브루크너였기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당시 구자범 지휘자 사태 직후라서였는지 약간 어수선한 기운들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연주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여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지휘자 진솔이 ‘내 인생의 공연’으로 꼽은 경기필하모닉오스트라 제136회 정기연주회 포스터.

무대 위에서 교수님은 1시간 30분이 넘는 대장정을 암보로 지휘하기를 원하셨다. 예술의전당에서의 당일 리허설 때까지만 해도 조금 여유 있는 템포와 사운드를 추구하신다고 생각했는데, 공연 때는 평소 리허설보다 약간 빠른 템포를 유지하며 열정적으로 연주하셨다. 연주가 끝나고 조심스레 여쭤보았더니 “아드레날린!”이라고 외치셨다. 마치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듯 완전히 심취해서 연주하셨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4악장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그 매력적인 서두 부분을 더욱 빠르고 격하게 가져가서 규칙적으로 쿵쿵거리는 본래의 사운드와 다르게 조금씩 빨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마치 격정적으로 도망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강조된 서두 덕분인지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호른의 속삭임과 현악기의 위로가 나를 더욱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객석에 앉아 있던 나는 마치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러 날에 걸쳐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질리도록 들으며 공부할 수 있었던 과분한 기회와 예술의전당에서 교수님과 온종일 함께하며 귀의 축복을 누렸던 추억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와 아르프 교수님, 그리고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리허설부터 공연까지 매일 교수님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학생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무엇이든 가르쳐주고 싶어 하는 ‘진짜배기’ 선생님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진지한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학생 시절 일대일 사제 관계를 맺은 선생님이 거의 없었던 탓에 교수님과의 인연은 내게 참 소중했다. 교수님은 그 뒤로도 나의 독일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자녀가 없어서인지 제자들에게 큰 애정을 가지고 계셨던 데다 붙임성이 없어 어른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던 내 성향을 눈치채고 먼저 다가와주셨던 것 같다.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진솔의 <마탄의 사수> 리허설 후 클라우스
아르프 교수는 포스트잇에 피드백을 적어
악보에 붙여주었다. ⓒ진솔

지휘자 클라우스 아르프Klaus Arp가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함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선보였다.

2014년 독일 만하임국립음악대학 현대음악 수업인 ‘Incontro’의 기말 공연을 지휘하는 진솔. ⓒ진솔

갑작스러운 병으로 돌아가신 지도 벌써 4년이 지난 지금, 고인을 회상하며 그때의 무대를 돌이켜본다. 그 뒤로도 예술의전당에서 몇 번 더 브루크너 교향곡 8번 공연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나에게 처음이기도 했고 정말 진지하게 공부하면서 들었던 아르프 교수님의 연주가 기준이 되어,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들을 때마다 교수님의 연주에 새로운 음악이 점점 덧입혀지는 듯하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수차례 더 만나게 되겠지만 그때마다 2013년 8월의 열기와 선생님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진솔 지휘자
‘플래직’ 대표, ‘아르티제’ 예술감독
대구MBC교향악단, KNIGA오케스트라 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