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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영국의 자세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스티븐손드하임시어터 ©ILOVESTAGE IMAGE LIBRARY

공연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은 전자 상거래, 디지털 이미지 등이 범람하는 사이버 시대에 홀연히 살아가는 유리 세공업자나 아직까지 실과 바늘로 가죽 구두를 제작하는, 시대에 뒤처진 기술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우리는 대량생산체제와 눈부시게 발전된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돌을 깎아 조각상을 만드는 고대의 장인처럼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의 몸이 모여야 가능한 원시 예술가들의 제작 방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조치가 발표되고 400여 년 전 흑사병이 돌던 시절에도 닫히지 않았던 극장들이 폐쇄되자 영국 공연계는 전례 없는 충격과 어려움에 빠졌다. 두 달 전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영국 내 주요 극장들은 311일 세계보건기구(WHO)의 팬데믹(Pandemic) 선포 이후 어떤 대응 방침을 세웠을까? 또 영국 정부와 산업계는 어떤 지원 정책을 발표하고 있을까?

영국 정부의 일자리 유지 정책(Job Retention Scheme)

먼저 정부는 ()영리 극장의 규모에 상관없이 모든 영국 예술 단체에 적용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는 코로나19 위기 기간 동안 직원을 해고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급여를 지급해 공연 생태계를 유지하려는 데 의의가 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이 정책은 노동계약서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영국 고용법상 임금 지급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극장주나 예술 단체장이 먼저 해당 직원들을 정리해고해서는 안 되며 임시 휴가(Furloughed Workers)로 국세청에 신고해야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다.

2. 영국 국세청은 온라인으로 등록이 가능하도록 긴급 셋업 창을 구성하고 있으며, 2,500파운드(380만 원)의 상한선을 두고 임시 휴가 중인 직원에게 임금의 80퍼센트를 지급한다.

3. 이 임시 휴가 기간 동안 직원들은 고용을 유지하되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되며 31일부터 소급 적용이 가능하다. 나머지 20퍼센트를 채워주는 것은 극장주나 예술 단체의 재정 상태에 따라 자유의사에 맡긴다.

4. 재무장관의 발표에 따르면 이 정책은 3개월 동안 지원될 예정이나 팬데믹 상황을 주시해 필요에 따라 기간 연장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이는 공연계를 포함한 영국 산업계 전체에 적용되는 기본 정책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단시일간에 급하게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도 아직 세부 조항의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필요에 따라 업데이트된 구체적 내용이 공지될 예정이다.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관객의 발걸음이 사라진 앰배서더시어터(좌)와 노엘코워드시어터(우). ©ILOVESTAGE IMAGE LIBRARY

영국 내 극장의 대응 방식과 남겨진 프리랜서들

웨스트엔드를 포함해 영국 전역에서 약 32개의 극장을 운영 중인 앰베서더시어터그룹(Ambassadors Theatre)은 위와 같은 정부 지침에 따라 대부분의 직원들에게 지난주부터 90일 가량의 유급 휴가 신청을 받고 있으며, 매니저급 직원들은 무임금으로 극장에 남아 환불 등 코로나19 비상대책 업무를 처리 중이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직원들은 극장주의 판단에 대체로 동의하면서 이 시기가 끝나고 다시 극장 문이 열릴 때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계획 수립을 위해 분주하다. 하지만 영국예술위원회(ACE)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작은 극장들은 해고 없이 3개월을 버틸 여력이 없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공연계는 어떤 기관에 소속되어 매달 급여를 받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채 프리랜서나 자영업으로 등록하여 스스로 소득과 세금을 정산하는 사람들로 나뉘는데, 영국 창조산업 인력 전체의 약 3분의 1이 이 분류에 해당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번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이런 집단에 지원이 소홀해지면 재능 있는 한 세대 전체가 공연계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져 있다. 스토리텔링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늘 함께해온 이들은 대부분 명예나 부에 대한 욕심 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지만 정작 이들을 위한 사회 안전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 내 작가, 프로듀서, 평론가, 배우, 무대 크루 등 공연예술업계 프리랜서들은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달한다. 문제는 제작사나 극장이 들어둔 보험(Theatre, Arts Venue Insurance)들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런던극장협회와 연계해 영국의 약 130여 개 극장과 협업 중인 공연 전문 보험사 인테그로(Integro Insurance)의 대표인 앤디 루지(Andy Rudge)에 따르면 향후 입장의 변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실직, 극장 폐쇄, 제작사 피해를 보상하는 약관은 현재까지 없다고 한다. 다만, 인테그로 사는 오랫동안 공연계와 연계해 업계에 없는 보험 약관을 함께 디자인해왔기에 일부는 선의의 차원에서 보상이 고려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영국 정부의 예술 단체 지원책은 코로나19 사태 동안 공연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ILOVESTAGE IMAGE LIBRARY

공연계 종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재무부의 추가 특별 지원

재무부에서 발표한 정책 가운데 공연 제작사, 극단 및 극장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지원 내용이 있지만, 여전히 프리랜서들을 위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공연 제작사, 극단, 극장 대상 지원책

250명 이하 조직에서 코로나19로 인해 법이 규정하는 유급 병가(최대 14일)에 지불되는 비용은 국가가 전액 보상한다.
• 코로나19로 중소 단체의 사업에 차질이 생겼을 경우, 최대 120만 파운드(약 17억 원)까지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있게 한다.
• 소규모 단체에 3천 파운드(450만 원) 지원 및 장기간 법인세 인하를 검토한다.

공연계 종사자 대상 지원책

• 코로나19 증상이 아니더라도 격리 조치를 권고받은 경우 법이 규정하는 일일 비용을 지급한다.
• 배우나 예술가들에게 소득이 없을 경우 국가로부터 지급받는 휴직 수당의 신청 절차를 간소화하여 빠르게 지급한다.
• 바이러스가 진정될 때까지 저소득층이나 무직자에게 월별 차등 지급되었던 정부 지원금 수령 절차를 간소화한다.

출처 : 2020 영국 재무부 예산 정책 자료

영국 예술위원회의 긴급 자금 지원

영국 정부의 지원 정책 외에 예술위원회 측에서 발표한 내용이 있다. 갑작스러운 코로나19 사태로 극심한 재정 위기와 예술인들의 수익 손실분을 보전하기 위한 예술위원회의 긴급 지원금 대상자에 그동안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단체나 그렇지 못했던 개인 프리랜스 예술가를 모두 포함한 것이다. 총액은 약 1억 6천만 파운드(약 2,400억 원) 규모로, 올해 이미 지원 단체로 선정된 곳(National Portfolio Organisations)에는 사업 기한을 1년간 연장해주고 추가 9천만 파운드(1,370억 원) 지원을 약속했다. 또한, 올해 사업 지원에서 배제되었던 단체에는 5천만 파운드(760억 원)를 별도 편성해 지원하기로 했다. 나머지 금액인 2천만 파운드(306억 원)는 개별 프리랜스 예술가들이 최대 2,500파운드(380만 원)의 현금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자금은 이번 사태로 사업 집행이 원천 보류된 프로젝트 기금과 복권 기금, 그리고 정부의 비상사태 보유금에서 충당했다. 이것은 소위 예술가들의 생존 자금으로 분류되어 지난 330일부터 지급, 6주 내 모두 집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예술위원회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충분하지 않고, 대부분이 프리랜서나 자영업으로 등록돼 있는 공연계의 실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평이다.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대표적인 영국의 공연 단체들은 정부 지원보다 더 빠르게 자구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ILOVESTAGE IMAGE LIBRARY

공연계 내의 움직임

정책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보니, 조합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며 정보를 취합하고 나눈 후 정부를 다시 설득하는 모양새다. 아울러 추가적으로 조합과 업계 종사자들이 정부 지원을 기다리기보다 발 빠르게 자구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23개의 공연계를 대표하는 ()영리 단체들이 뜻을 모아 기부, 자선 행사, 정보 공유 등등 업계의 모든 요구사항을 하나의 채널을 통해 충족시키는(One Stop Shop) 사이트 theatresupport.info를 만든 것이 좋은 사례다.

정부 정책이 금전적인 지원에 집중되었다면 공연계의 독자적 움직임은 배우 조합(Equity)을 주축으로 이들의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주선하기도 하며(ArtsMinds, Theatre Helpline), 어린 자녀들을 배우로 둔 부모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움직임도 있고(Actors’ Childrens Trust), 음악 연주자와 오페라, 발레 종사자를 위한 펀드도 조성했다(Help Musicians, ROH Benevolent Fund). 해당 분야 종사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번 자구책은 일감을 잃은 크루를 지원하는 조직(The Theatrical Guild), 특정 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단체나 개인에게 극장이 지원하는 펀드(Drury Lane Theatrical Fund, Masterclass), 프리랜스 프로듀서가 이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컨설팅(Stage One) 등 세부적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져 있다.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시어터 헬프라인(Theatre Helpline)은 공연계 종사자의 심리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돕는 안내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외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프리랜스 배우들에게 계속 일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한 시어터 카페의 온라인 스트리밍 기부가 진행 중이며, 42일부터 유튜브로 시작하는 국립극장(NT)의 무료 온라인 공연 <Show Must Go On-line>에는 왕립셰익스피어극단(RSC)을 포함해 영국의 많은 단체들이 동참하고 있다. 공연을 영상화하는 것은 절대로 대안이 될 수 없고 공연계를 살리는 방식도 아니라는 게 지배적인 인식이나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는 시점에 공연 산업을 다시 빠르게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국 공연계의 잊혀진 2020년

공연 문화가 발달한 영국은 공연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영국 국립극장(NT)의 무료 온라인 공연 <Show Must Go On-line>에는 영국의 많은 공연 단체들이 동참하고 있다.

41일 만우절 아침, 정말 거짓말처럼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공식 취소 발표문이 공지되었다. 영국의 극장들은 전염병이나 제2차 세계대전, 9·11테러사건 같은 외부적 위기가 있을 때에도 사태를 피하지 않고 관객과 함께했다. 그래서 정부의 전면적 공연장 폐쇄라는,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적 발표가 나온 지 몇 주가 지났음에도 공연계 종사자들의 놀라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공연장 폐쇄나 축제 취소는 모여서 함께 행동하고자 하는 인간의 사회적인 본성과 그것을 담아내려는 공연의 가치에 반하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뚜렷한 대안이 없기에 이것이 곧 유일한, 올바른 결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영국 공연계는 극장가의 수입이 전년 대비 92퍼센트나 하락하면서 이례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공연은 공산품처럼 잠시 창고에 넣어 보관하다가 다시 꺼내져 소비되는 상품이 아니다. 잠시 멈춘 공연이라도 제작사는 다시 투자를 받아 창작팀을 꾸려야 하고, 배우들과 처음부터 리허설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번 코로나19의 위험이 지나간다 해도 한번 발걸음을 멈춘 관객들이 극장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런 조치가 언제 해제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제 갓 졸업한 영국의 드라마 스쿨 학생들에게 2020년은 잊혀진 한 해가 되지 않을까.

김준영 프로듀서
김준영은 공연 해외 유통 및 축제 관련 컨설팅 등 업무를 수행하는 런던 웨스트엔드 ILOVESTAGE 사의 수석 프로듀서다. 한국과 영국 간 공연 교류를 위해 연극 및 뮤지컬을 번역하고 로컬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공연 전문지에 관련 소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