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TALK

마흔 살 차이 두 바리톤과 함께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사진 ⓒ김시훈

이번 연재는 무대에 서는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을 다룹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공연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즘,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아티스트들의 목소리를 관객분들께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기획했습니다. 예술가들의 인생에서 크게 힘이 되었던 공연이나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준 공연을 소개함으로써 위기 극복에 대한 희망이 여러분께 전해지길 바랍니다.

이번 호에서는 스위스 바젤과 루체른, 취리히에서 유학하고 공연을 해온 피아니스트 이소영이 2018년 10월 2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바리톤 김성길&이응광 가곡 콘서트>를 돌아보았습니다.

살다 보면 생각지 못한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고 했던가. 목표를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뜻밖에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준비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식사 자리에 초대받았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명예교수이신 바리톤 김성길 선생님과 그의 제자 바리톤 이응광 선생님과의 시간이었다. 성악가 김성길 선생님은 대한민국 성악계 1세대를 대표하는 거목이시며 줄리아드음악대학교 유학 당시 마리아 칼라스의 마스터 클래스를 몸소 체험하기도 하셨다(그 희귀한 영상은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자한 표정의 김성길 선생님은 가끔 주변 사람들을 크게 웃게 하는 유머러스함도 지니신 유쾌한 분이다. 스위스 바젤오페라극장에서부터 같이 연주를 하기도 한 이응광 선생님은 매력적인 성품과 보이스의 바리톤이다. 남들보다 조금은 늦은 나이에 스위스 유학길에 오른 나는 루체른음악대학교 캄머무직 반주과(Kammermusik Begleitung) 입학시험 날 이응광 선생님이 불러주시는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에 맞춰 전곡을 반주했다. 그 자리에 계셨던 에드워드 러쉬턴(Edward Rushton) 교수님은 연주가 끝난 뒤 바로 나를 제자로 받겠다고 하셨기에 이응광 선생님은 그 놀랍고 기뻤던 순간을 함께한 소중한 인연이다.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스위스 루체른 음대에서의 졸업 연주 모습.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루체른 음대에서 만난 스승 에드워드 러쉬턴 교수님과 함께.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스위스 루체른 음대에서의 졸업 연주 모습.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루체른 음대에서 만난 스승 에드워드 러쉬턴 교수님과 함께.

40년 차 사제의 하모니

두 분은 스승과 제자의 듀오 콘서트를 계획 중이셨다. 당시 78세의 바리톤과 38세의 바리톤, 40년의 세월 차이를 한 무대에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운 음악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 분이 15년 전의 레슨 시간을 돌이켜보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들은 소리에 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함께 연구하는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실 사제 음악회라는 것이 의미 있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스승과 제자 모두에게 나름의 부담이 되는 연주인 것은 분명하다. 목소리에서 세월이 그대로 드러나는 성악가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스승에게는 전성기를 지난 목소리로 당신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한 무대에서 노래를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고, 제자에게는 스승의 가르침을 토대로 능력을 발전시키고 있는 과정에서 일종의 테스트를 받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이날의 음악회 1부는 영미 가곡으로, 2부는 한국 가곡으로 구성되었다. 특별히 2부에는 독일인의 반주와 러시아인의 목소리로 한국 가곡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를 꾸미기 위해 독일 출신 피아니스트 캐서린 레히슈타이너(Catherine Rechsteiner)와 러시아인 소프라노 아나스타시아 코츠카로바(Anastassiya Kozhukharova)를 초대했다. 캐서린은 독일에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James Galway)의 전속 반주자다. 한국 가곡은 발음의 특성과 발성적인 면에서 한국인 성악가에게도 까다로운데, 아나스타시아는 ‘신아리랑’과 김효근 작곡의 ‘눈’을 러시아인 특유의 소리와 색채로 들려줄 예정이었다.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공연을 앞두고 기자 간담회를 가졌다. 사진 ⓒ김시훈

반주는 서브다? 반주의 미학

어떤 청중들은 반주자를 솔로이스트의 배경, 혹은 솔로이스트의 음악을 서포트하는 역할이라 생각을 한다. 사실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음악회에서 솔로이스트의 역량이 가장 중요하고, 이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공연장으로 발걸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예전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와 피아니스트 제럴드 무어(Gerald Moore)처럼, 혹은 최근 바리톤 마티아스 괴르네(Matthias Goerne)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만남처럼 솔로이스트와 반주자의 합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솔로이스트가 자신의 음악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끔 서포트하는 자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무대에서 어떤 상황이 일어나도 솔로이스트가 동요하지 않을 만큼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어야 하는 반주 파트너는 크나큰 신뢰를 바탕으로 한,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주어야 한다. 음악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을 논의하고 서로의 색깔을 함께 맞춰나가며 무대에서의 긴장감을 이기고 서로에게 집중해 아름다운 합을 이룰 때, 연주자들은 그들 스스로도 감동과 희열을 느낀다. 그때의 감동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크며 그 에너지는 청중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좋은 파트너

김성길 선생님의 제안으로 피아니스트가 입국하기 전 준비 과정을 함께하기로 했다. 이 기간 동안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무대를 준비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 준비해야 하는 곡들이 많고 암보에 대한 부담이 크기 때문에 당신이 그간 불러온 익숙한 레퍼토리로 무대에 오르는 것이 편하실 텐데도, 새로운 레퍼토리를 선정해 공부하시고 수차례 만나서 연습하며 암보하시는 열정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늘 도전하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연구하는 모습이야말로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공연 당일 리허설 모습. 사진 ⓒ김시훈

리허설이 예정되어 있던 서울대학교 캠퍼스는 때마침 단풍과 살랑살랑한 바람으로 금세 다가온 가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적소였다. 음악회 3일 전 선생님과 캐서린이 처음 호흡을 맞추는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선생님께서는 1부 프로그램인 영미 가곡 다섯 곡을 한 번 쭉 부르시고는 돌연 리허설을 중단하시더니 나에게 다가오셔서 음악회 당일 당신의 무대에 함께해주기를 제안하셨다.

2018년 가을, 두 남자의 콘서트에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게 초대되었다. 그 때문에 공연 포스터의 어디를 봐도 내 이름은 없었고 나는 음악회 당일 프로그램북 내 엑스트라 삽지로 소개되었다. 음악회 3일 전에 함께하기로 확정이 되면서 나는 급하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음악적인 부분과 선생님의 호흡은 연습하는 동안 자연스레 익혔기 때문에 걱정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 그 일을 잘해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김성길 선생님은 젊은 연주자로부터는 나올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감동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사진 ⓒ김시훈

연주회 당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3층까지 청중으로 가득 찼다. 노장의 목소리로 들려주신 애런 코플런드(Aaron Copland)의 ‘올드 아메리칸 송스(Old American Songs)’ 중 ‘롱 타임 어고(Long Time Ago)’는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그렇게 아름다운 거장의 연주가 이어졌는데, 갑자기 연주를 멈추시는 것이 아닌가. 가사를 잊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당황치 않으시고 물을 드시러 잠시 퇴장을 하셨다가 곧이어 넓은 콘서트홀로 다시 나오셨다. 모든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와 박수로 응원을 보냈다. 이어진 거장의 연주는 건강하고 싱싱한 성대로는 들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감동을 선물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커튼콜에서의 긴 박수갈채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티스트가 직접 소개하는 ‘내 인생의 공연’

관객들은 긴 박수갈채로 마흔 살 차이가 나는 두 바리톤의 공연을 축하해주었다. 사진 ⓒ김시훈

노장은 죽지 않는다

2014년 유학 시절, 루체른 KKL콘서트홀에서 새하얀 머리칼에 구부정한 몸으로 피아노에 앉았던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의 무대가 떠오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으로 기억하는데, 수없이 들었던 그 곡이 그날은 내게 다르게 다가왔다. 음악에서 문득 그의 세월과 연륜이 배어 나왔다. 베토벤이 곡에 불어넣은 영혼과 그것에 더해 폴리니의 삶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니 세월에 부딪히며 쌓인 무언가가 그대로 다가오는 듯했다. 그것은 이미 테크닉을 떠난 것이다.

오랫동안 잘 숙성된 좋은 와인은 그 어떤 젊고 화려한 와인이 낼 수 없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깊은 향과 맛이 깃들어 있다. 몸은 쇠하더라도 영혼은 살아 있어 나이를 더해갈수록 더 진하고 깊은 음악을 보여주는 것이 연주자들의 사명이지 않을까.

피아니스트 이소영
스위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국내에서 성악 반주 전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