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TALK

예술의전당에서 느낀 설렘과 행복

예술의전당 관객 에세이 공모 선정작 발표 ②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씻어준다”. 스페인 출신의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남긴 말입니다. 느긋하게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갖지 못하는 현대인의 각박한 삶을 떠올린다면 예술은 유일무이의 비상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코로나19의 여파로 보통의 일상마저 소중하게 다가오는 요즘, 예술은 자식의 배를 쓰다듬어주던 따스한 엄마의 손길처럼 우리를 위로해줄 것입니다. 우리를 웃게 하고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주며 치유해주는 예술의 힘. 그 힘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예술의전당은 ‘관객 에세이 공모’를 개최했습니다. 예술의전당 웹진 편집팀에서 여섯 편의 에세이를 엄선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정작 중 그림을 통해 꿈을 키우고 시련의 시간을 견뎌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두 편을 소개합니다.

같은 공간, 다른 느낌

누구에게나 고3은 뼈저리게 아픈 기억이다. 나 역시 2년 전, 작은 규모의 지방 일반 고등학교에서 인서울 대학 진학을 꿈꾸며 밤을 새워 공부하던 고3이었다. 확실한 꿈도, 목표도 없이 무작정 달리던 소녀에게 유일한 희망과 힐링은 그림 감상이었다. 흔히 말하는 ‘똥손’이라 그림 실력은 엉망이었지만, 그림을 바라보며 그 속에 빠져들어 생각에 잠기는 게 좋았다.

경상도 어느 시골에 살던 소녀는 좋아하는 그림을 보려면 큰마음 먹고 버스에 올라 3시간여를 달려 서울로 가야 했다. 입시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전시회는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였다. 전날 밤을 새워가며 두 배로 공부한 뒤, 기숙사 외출증을 꾹꾹 눌러쓰고 전시를 보러 가는 주말 하루의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버스 창문 밖 풍경도, 귀에 대충 눌러 꽂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흥겨운 노랫소리도 심장을 콩콩 뛰게 했다. 설레는 외출의 목적지는 대부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이었다. ‘서울이라 하면 크고 멋진, 음악분수도 있는 예술의전당 아니겠어’ 하던 시골 소녀의 로망이 담긴 장소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사람 많은 지하철이 어색해 남부터미널역까지 가는 길을 시골 쥐처럼 눈을 끔뻑이며 헤매기도 했었다.

예술의전당 웹진 편집팀에서 여섯 편의 에세이를 엄선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정작 중 그림을 통해 꿈을 키우고 시련의 시간을 견뎌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두 편을 소개합니다.
예술의전당 웹진 편집팀에서 여섯 편의 에세이를 엄선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정작 중 그림을 통해 꿈을 키우고 시련의 시간을 견뎌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두 편을 소개합니다.

풍만한 체형의 여성을 표현한 니키 드 생팔의 ‘나나’ 시리즈

아직도 2018년 여름, 예술의전당에서 본 <니키 드 생팔>展의 기억이 생생하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과 아주 잘 어울리던 형형색색의 작품들이 강렬했다. 온몸 가득 땀 흘리며 작품 하나하나를 모두 눈에 담으려 발걸음을 늦췄었다. 전시장 맨 끝 출구가 다가오는 게 아쉬워 작품을 보고 또 보고, 한 작품 앞에 한참 동안 서 있기도 했다. 수능 전 보는 마지막 전시회일 테니까, 이제 돌아가면 오늘 이 기억으로 남은 수험생활을 버텨야 하니까. 예술의전당을 나서며 다짐했다. 꼭 대학에 합격해 예술의전당에 다시 올 거라고, 합격생의 당당한 발걸음으로 멋지게 이 자리 그대로 돌아올 거라고.

일상으로 돌아와 입시를 준비하는 건 정말 힘들었다. 누구나 그랬듯이 아침부터 밤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책상에 붙어 앉아 쏟아지는 졸음을 쫓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전시회에서 사 온 그림엽서들을 학습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힘이 들 때마다 뚫어져라 바라보며 힐링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새로이 의지를 다졌다. 엽서들이 바래갈 때쯤 수능을 치렀다. 시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 직전까지 부적과도 같았던 엽서를 쳐다보았다. 3년간의 피땀이 담긴 수능이 끝난 뒤 미용실에서, 놀이공원에서 수험생 할인의 특권을 실컷 즐기며 시원섭섭하게 수험생활을 떠나보내고 마침내 나는 서울의 한 대학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꿈꿔오던 결실을 보고 나서, 여름에 했던 다짐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가족과 친구들과 합격의 기쁨을 나누고 곧장 서울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전시회에는 니키 드 생팔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스케치도 소개됐다.

차가운 바람이 불던 한겨울 버스 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미묘했다. 누가 봐도 수능을 끝낸 고3처럼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나름대로 최대한 멋을 부린 옷차림, 무거운 짐 하나 없이 홀가분한 내 마음이 너무나도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때 예술의전당에선 <피카소와 큐비즘>展이 열리고 있었다. 대학 합격이라는 가장 기쁜 순간을 맞이한 뒤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피카소의 그림을 보게 되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예술의전당에 도착했을 때 눈물이 날 뻔했다. 여름의 굳은 다짐이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이젠 정말 서울에서 살게 될 거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예술계의 새로운 도전을 의미하는 입체파의 그림이 마치 나의 20대 첫 시작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튈르리 살롱의 초대형 작품을 마주했을 땐, 그 압도감에 잠시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겨울의 예술의전당 전시는 그 여름의 어느 날과 달리 퇴장이 아쉽지 않았다. 이젠 언제나 올 수 있는 곳이 되었으니까, 애틋한 기억의 장소를 넘어 앞으로 수많은 추억을 쌓아갈 장소가 될 테니까.

<피카소와 큐비즘>展 전시장 전경

온 세상이 푸르던 봄, 대학 새내기로 갔던 <베르나르 뷔페>展, 새내기 시절의 마지막을 함께한 <툴루즈 로트렉>展, 1년간 나름 익숙해진 서울 생활 중 방문한 <모네에서 세잔까지>展. 예술의전당에 그림을 보러 올 때면 매번 다른 느낌과 추억을 안고 돌아간다. 혼자만의 추억을 만들기도 하고, 같이 간 친구와의 깊은 대화를 마음속에 새겨두기도 한다. 수험생 시절 의지를 다지기 위해 학습실 책상에 붙여두었던 그림엽서들은 자취방 벽면을 하나하나 추억으로 예쁘게 꾸미고 있고, 새내기 티가 나던 앳된 소녀는 대학생활에 익숙해진 어른이 되었다. 이젠 헤매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힐링이 필요할 때마다 보고 싶은 그림을 실컷 본다.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도 성격도 많이 변해왔지만 전시장에 대한 애틋한 기억, 그리고 그림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또 다른 색깔의 추억들이 쌓이기를, 가슴속에 아름다운 작품들로 가득한 ‘추억의 전당’이 지어지기를 기대해본다.

박서연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 항상 음악과 그림을 가까이 하는 예술 애호가다.

‘오늘 하루, 딱 너의 숨만큼만’

언제부터 나의 세상은 무채색으로 칠해진 것일까. 아마 사회생활 3년 차로 접어들면서부터였나. 소속된 조직에 적응해갈수록, 이상하게 ‘내’가 누구인지 더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릴 때 작은 꽃 한 송이에 손뼉 치며 좋아하던 아이는 이제 봄이 와도 웃지 않았다. 계절의 다채로움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런 증상이 곧 지나갈 거라 생각했다. 해마다 겪는 계절성 감기도 그랬으니까. 더욱이 모두가 겪는 이깟 감정 따위에 지고 싶지 않았다. 수년간 경험한 정글 같은 사회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가 멸종될 수밖에 없는 약자임을 자처하는 미련한 짓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나는 무시로 자취방에서 혼자 울었다. 그것은 그저 지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계절이 지나는 동안 슬픔은 무럭무럭 자라, 폐 속에도 눈물이 가득 차게 되었다. 더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자, 그제야 나는 작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내 인생의 첫 사직서였다.

나의 첫 사회생활의 마침표는 그렇게 눅눅하게 찍히고야 말았다. 몇 년 만에 얻게 된 빈 시간이었지만 처음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그저 낮과 밤만이 존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나처럼 SNS에서 남의 행복을 터치하던 손가락이 멈췄다. 동화책에나 어울릴 법한 화풍이었다. 머리에 이상한 꽃들이 가득 피어난 어떤 캐릭터가 슬며시 웃는 그림을 보면서 몇 년간 등장하지 않았던 색깔이 마음에 칠해졌다. 그리고 별안간 이유는 모르겠으나 곧장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 이 그림을 꼭 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림 밑에는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이라고 적혀 있었다. 본능적으로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展 티켓을 예매하고, 오래간만에 커튼을 젖혀보았다. 바깥에는 몇 년간 잊고 지내던 생경한 봄이 찾아와 있었다.

예술의전당 웹진 편집팀에서 여섯 편의 에세이를 엄선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정작 중 그림을 통해 꿈을 키우고 시련의 시간을 견뎌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두 편을 소개합니다.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은 작품 <활짝 핀 꽃>, 2018, 130×195cm, 캔버스에 유채 ⒸEva Armisén

부끄럽지만 고등학교 시절 음악 숙제를 하기 위해 예술의전당을 찾았던 이후 15년만의 방문이었다. 사실 이곳에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간 나는 왜, 예술의전당에서 연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예술’은 참 다양한 것을 담고 있는데 말이다. 클래식, 클라리넷, 오페라와 같이 우아하게 발음되는 ‘거룩한’ 장르만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아이부터 노인까지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훨씬 친숙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도슨트 투어 시간에 맞춰 전시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멀뚱멀뚱 어색해하다가 오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도슨트의 따뜻한 목소리로 마치 동화를 듣듯 작가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아이들까지 세심하게 배려한 마음도 곳곳마다 눈에 띄었다. 작품뿐만 아니라 관객 또한 그 전시의 일부처럼 다정하게 기억되는 것도 그 때문일까.

특별히 꽃이 만개한 <활짝 핀 꽃(En flor)>이란 작품이 처음부터 시선을 끌었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림 속 인물이 검은 배경에 눈을 감고 있는 그림이었다. 도슨트는 작가의 마음을 빌려, 머리에서 마구잡이로 피어난 꽃의 비밀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모두의 내면에는 꽃이 있는데, 이 꽃은 어렵고 좌절될 때 피어난다고 한다. 깜깜한 그때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꽃들이 마음에서 자라나듯 모두에게 다시 일어날 용기, 혹은 소망이라는 꽃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애써 도슨트의 눈을 피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흐른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그동안 누구에게도 받지 못한 다정한 위로였다. 그제야 그림 속 웃음이 아이처럼 천진할 뿐만 아니라 아주 단단하고 야무져 보였다. 나처럼 그 웃음을 바라본 모두에게 ‘당신에게도 숨겨진 아름다운 꽃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좌)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담은 작품 <함께>, 2018, 195×130cm, 캔버스에 유채 ⒸEva Armisén/ 우) 제주 해녀로부터 받은 영감을 완성한 작품으로 동화책으로 발간되기도 했다.

이처럼 따뜻하고 솔직한 자화상들이 이내 일상을 주제로 내용을 확장했다. 가족, 강아지, 여동생, 사랑하는 사람, 산책···. 오랜 시간 나에겐 그저 무채색과 같았던 평범한 일상들이 작가의 시선을 거치니 알록달록 보석처럼 빛났다. 익숙한 배경인 서울 또한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공간으로 소개되었다. 나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홀려서 그림들을 보고, 눈을 감고, 그 시간을 즐겼다. 얼마나 따뜻했던가. 그동안 무심코 지나친 나의 일상들 또한, 작가의 화법으로 덧칠해보니 더는 무채색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 동생, 동네, 봄 그리고 나. 하나 같이 소중하고, 생명력 넘치는 꽃처럼 고와 보았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듯 전시회 마지막 장면은 에바 알머슨이 제주도 해녀들과 함께 작업한 동화책의 한 구절로 마침표가 찍혔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거라.

배우 박정자는 카리스마의 대명사다. 강렬한 눈빛과 중저음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의 연기를 보면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날 이후, 나의 세상은 그리 극적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소소하고, 익숙한 일상 속에서 다른 의미로 무채색처럼 납작한 자신과 마주하곤 한다. 변한 것이 하나 있다면 힘들 때마다 눈을 감고 그날을 조용히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러면 알록달록 만발한 꽃들을 머리 위에 피워낸 주인공이 활짝 웃으며, 작은 소리로 나에게 따뜻하게 한마디를 건넨다.
‘오늘 하루, 딱 너의 숨만큼만.’

그렇지, 그렇다. 딱 나의 숨만큼만 살면 충분하다. 그리고 빙긋 한번 웃어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여전히 참 살 만한 소중한 날들이여!

사진 서울센터뮤지엄, 디커뮤니케이션

박 유
자유 기고가. 다년간의 사회생활 후, 농사와 수영으로 잠시 인생의 쉼표를 찍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