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TALK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내 인생 최고의 공연

예술의전당 관객 에세이 공모 선정작 발표 ③

현재의 우리는 과거라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완성되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순간, 어느 장소, 그리고 누군가는 현재를 사는 동안에도 곁에 존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곤 합니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특히 마음에 커다란 감동을 안겨준 음악 공연은 소중한 추억으로 삶을 풍요롭게 꾸며줍니다. 무대 위 연주자의 숨소리에 귀 기울이고 손끝 움직임을 따라가며 음악의 세계가 주는 환희를 느낀 바로 그때를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추억을 함께 나누고자 예술의전당은 ‘관객 에세이 공모’를 개최해 여섯 편의 에세이를 선정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잊을 수 없는 클래식 음악 연주를 소개한 에세이 두 편을 만나봅니다. 이번 호로 선정작 소개는 마무리되지만, 예술의전당은 관객과 소통하는 또 다른 자리를 마련해 여러분 곁으로 찾아가겠습니다.

‘음악 전도사’의 첫 피아노 리사이틀

예술의전당 관객 에세이 공모 선정작 발표 ③

선우예권은 직접 기획한 생애 첫 리사이틀 <나의 클라라>(2019)로 청중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Jino Park

내 기억에 남는 공연은 2019년 6월 1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선우예권 피아노 리사이틀 <나의 클라라>다. 한 음 한 음 정성을 다해 건반을 누르는 모습, 가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온몸과 마음으로 연주하는 모습, 그렇게 음악에 몰두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혼이 빠진 듯한 큰 충격과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나의 연주를 들어라” 스타일의 연주가 아니었다. 청중에게 무관심한 채 자기 세계에 틀어박혀 연주하는 것도 아니었다. 연주자를 통해 작곡가가 보일 듯 꾸밈이 없는 연주, 연주자를 의식하지 않고 음악 자체에 빠지게 되는 연주였다. 오직 이 곡을 좋아해서, 이 곡이 전하는 감정을 청중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지는 연주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무대에 서는 이유라고 말하듯 곡에 대한 넘치는 애정과 깊은 사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득 그런 그를 보며 ‘음악 전도사’라는 수식어가 떠올랐다. 정말 그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청중을 작곡가가 그린 세계관 속으로 데려다주는 연결고리 같은 연주자. 작곡가에 대한 경의와 배려가 그처럼 감동적인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선우예권의 음악에 푹 빠졌다.

이날 공연은 프로그램도 슈만과 브람스, 그들의 뮤즈였던 클라라의 곡으로 구성되어 더 흥미로웠다. 클라라의 ‘노투르노 바장조, Op.6-2’에서는 감미롭고 애절하며 여성스럽고 섬세한 감성으로 부드럽게 시작했다가 슈만의 ‘판타지 다장조, Op.17’에서는 사랑에 대한 갈등과 고뇌부터 깊고 몽환적인 명상에 이르기까지 인간 내면의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제3번 바단조, Op.5’에서는 젊은 열정과 낭만이 교차되며 힘차고 장대한 세계관이 눈앞에 펼쳐지듯 증후하고 스케일이 큰 음악을 들려줬다. 브람스는 정말 압권이었다. 앙코르 무대는 슈만과 브람스의 곡들로 뮤즈 클라라를 향한 각각의 마음을 토로하는 듯한 시간이었다. 마치 부드러운 햇살이 감싸주는 듯 공연장 전체가 사랑과 온기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에 푹 빠져 곡에 흐르는 감정과 펼쳐지는 세계관을 따라 느꼈던 경험은 처음이었다. 청중인 나도 연주자와 같이 어떨 때는 탄식하고 어떨 때는 뜨거운 뭔가가 북받쳤고 또 어떨 때는 천상에 올라갈 것 같은 위로를 얻었다. 같이 숨을 쉬는 느낌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연주자와의 ‘공명’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희열이었다. 연주를 들은 후에도 그 잔잔한 감동은 긴 여운과 함께 내일을 사는 힘이 되었다. 삶의 원동력이 되는 ‘음악의 본질적인 힘’을 각인시켜준 의미 깊은 공연이었다.

예술의전당 관객 에세이 공모 선정작 발표 ③

2017년 제15회 반클라이번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오른 선우예권. ⓒJino Park

선우예권이 만들어내는 음악에는 마음을 채워주는 감동뿐만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파생력도 있었다. 그것은 나의 일상을 변화시키는 데 충분했다. 우선 그의 연주를 듣고 나서 클래식 음악의 세계가 가진 심오한 매력을 다시 가슴에 새겼고, 곡과 작곡가에 대한 관심도 여러 갈래로 깊어졌다. 첫 번째 변화는 슈만과 브람스, 클라라 세 명의 관계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 관련된 책을 몇 권 구매했다는 것. 그중에는 브람스와 클라라가 주고받았다는 편지 모음집도 있었다. 압화로 장식된 예쁜 책 표지가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이 압화 공예가 취미였던 클라라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아주 신선했던 기억이 있다. 갑자기 클라라에게 친근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사소한 발견도 나에게는 아주 큰 기쁨이 된다.

이렇게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시간을 갖게 해준 것이 첫 번째 파생력이라면, 두 번째는 그가 연주한 모든 곡에 매료되어 나도 그 곡들을 쳐보고, 깊이 연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클라라의 ‘노투르노 바장조, Op.6-2’의 악보를 봤는데 음표 외에 정말 많은 음악 용어인 ‘나타냄말’이 있어 놀랐다.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에너지 소모가 엄청난 곡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연주에 대한 욕심과 곡을 더 이해하고 싶다는 탐구심을 키워주는 파생력이었다.

마지막은 다른 연주자는 같은 곡을 어떻게 연주할까 궁금해졌다는 것이다. ‘같은 곡 다른 느낌’을 즐김으로써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파생력이다. 그의 음악이 가진 이러한 힘 덕분에 나는 연주 이후의 일상에서도 혼자 바빴다. 일상을 살면서 지친 마음을 나름의 문화적인 활동을 통해 채워줄 수 있어 행복한 바쁨이었다. 하나의 연주가 나의 삶을 이렇게까지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에 나 자신도 놀랍고 신기했고 그저 그 근원인 연주자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음악과 함께할 때 나답고 보다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렇게 스스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면 긍정적인 마인드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클래식 음악은 마음을, 삶을 풍요롭게 한다.

배우 박정자는 카리스마의 대명사다. 강렬한 눈빛과 중저음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의 연기를 보면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말이 마음 깊이 와닿은 공연이었다. 그날의 공연 후, 넘치는 감동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기나긴 연주자 사인회 줄에 섰었다. “멋진 연주 감사했습니다. 여운이 가시지 않아 일어설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전했더니 수줍어하며 “멋진 곡 덕분이에요”라고 답한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음악 철학이 응축된 짧은 한마디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이후 선우예권은 마음을 채우고 싶을 때 늘 찾는 연주자이자 참 고마운 분이 되었다.

사진 moc프로덕션

오카모토 미에코 번역 작가
한국에 시집온 지 12년 된 일본인. 항상 음악을 가까이하며 타국 생활을 열심히 달리고 있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취미이자 마음 치유법이다.

서울 방구석에서 베를린까지

예술의전당 관객 에세이 공모 선정작 발표 ③

<바이에른슈타츠오퍼오케스트라>(2017). ⓒK.Y.B.

2017년 9월은 유독 쓸쓸했나보다. 원래 방콕주의자인데도 주변의 여백이 싸늘하게 아려오니 외출해서 무엇이든 해야 그 고독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마트폰으로 영화관 앱을 둘러보는데, 마침 독일 오페라 기행을 다룬 행사가 흥미로워 보였다. 무거운 엉덩이를 겨우 떼 방구석에서 삼성동 영화관으로 향했다.

황지원 클래식 음악 평론가님이 행사 끝 무렵에 마침 오늘 소개된 오페라단의 공연이 곧 예정돼 있으니 관람해보라고 권했다. ‘오?’ 바로 검색했다. 메인 연주곡은 말러의 작품이었는데 엄청난 고전인 데다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 안전하게 합창석 F존 3열 1번을 예매했다. 부담 없는 가격에 공연자들이 잘 보이는 합창석을 종종 선택하는데, 그날은 오른쪽에 앉았더니 팀파니가 앞에 딱 보였다. 아뿔싸.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 내 오른쪽 자리에 앉아계시던 한 여성분이 “저기요”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자주 혼자 공연 관람을 하지만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온 건 처음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하면서 긴장됐다. 무엇 때문이지. 내가 불편하게 했나. 평생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개인주의를 사수해왔는데. 찰나의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우리 아들이랑 자리 좀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아들과 함께 오셨으면 나란히 앉는 자리를 예매하셨어야지. 개인주의를 뽐내는 속마음을 드러낼 뻔한 순간! “우리 아들 자리는 1층 중앙 앞줄이에요.” “네, 감사합니다. 바꿔드릴게요.” 알고 보니 아드님의 스승이자, 이번 오케스트라의 팀파니스트가 아드님과, 그와 함께 온 동기의 자리인 중앙 좌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며, 본인과 내 자리에 제자들이 앉아 스승을 볼 수 있게끔 양해를 구하신 거였다.

인터미션이 끝날 새라 바꾼 자리로 허둥지둥 옮겨 앉았는데 받아 든 티켓을 보니 내가 구매한 좌석 가격의 10배쯤 되는 듯했다. 지휘자의 표정까지 보이는 자리였다. 이 정도 수준의 공연을 이렇게 앞자리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예술의전당 관객 에세이 공모 선정작 발표 ③

40대 중반에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선임되며 재능을 인정받은 키릴 페트렌코. ⓒK.Y.B.

말러를 흔한 스트리밍 앱에 검색하면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이 자동완성된다. 그땐 몰랐다. 2017년 9월 13일 수요일, 그날의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제목: 감동과 눈물의 말러
지휘자도 울고, 나도 울었다.

지금도 그때의 휘몰아치는 4악장을 상상하니 또 심장이 두근거리며 묵직해지는 것 같다. 무엇보다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이 어려운 이름을 이제 쉽게 외운다)의 진정한 열정은 나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단원들, 그날의 관람객들에게 오롯이 전해졌다. 눈물과 땀, 뻔하디뻔한 그것이 어쩜 그리 독하게도 진한지. 좋은 오케스트라란 이런 거구나. 마치 한 사람이 내는 소리 같았다. 지휘자의 지휘봉이라는 한 악기에서 나는 소리. 내 의지 없이 파도에 휩쓸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작년 2019년 12월 베를린에 갔다. 아무도 안 가는 황량한 겨울의 독일로.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 키릴 페트렌코의 궤적을 따라서였다. 아쉽게도 직장인의 휴가 일정은 매우 제한적이기에 신임 지휘자의 공연을 관람할 수는 없었지만,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 공연장을 다녀왔다. 황금처럼 빛나는 모습에 눈이 부셨다. 2년 전 휩쓸렸던 그 감동과 공감의 파도에서도 그와 같은 빛이 났다. 귀국해 2020년 새해를 맞은 이후,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와 함께하는 <2020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신년음악회> 공연 실황을 3년 전 그 삼성동 영화관에서 접할 수 있었다. 영상 속 공연장에 있었던 나를 상상하며 거슈윈의 ‘파리의 미국인’을 들었다. 난 독일의 한국인이었다.

바이에른슈타츠오퍼오케스트라 공연이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는 나에게 회사 동기가 물었었다. 클래식 음악이 도대체 뭐가 감동적이냐고. 그 질문에 당장 답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뒤늦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서울 7평짜리 내 방구석에서
2년에 걸쳐 베를린이라는 생경한 곳에 발 닿게 한 그런 힘이라고.

음악은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지만, 잊을 수 없는 감동의 황금빛 물결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 번 경험하면 계속해서 찾게 된다. 스트리밍 앱에서 듣더라도 그 감정이 어렴풋이 느껴진다. 지금처럼. 높은 안목을 가진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아니지만, 인생의 공연에 대한 경험을 공유할 수 있어 감사하다. 촉박한 출근 시간 지하철 계단을 뛰어오를 때 빼고는 심장 두근거릴 일 거의 없는 일상생활 속 좋은 공연과 좋은 추억이란, 그 출근길을 또다시 몇 년은 지속하게 할 몇 가지 원동력 중 하나가 된다.

오늘도 작은 내 방구석 침대에 기대어, 작년 12월에 올렸던 인스타그램 게시물들을 스크롤한다. 슥슥. 🙂

사진 빈체로

 고아라
전시회 보기, 공연 보기가 내 집 장만도 어려운 이 팍팍한 서울살이의 유일한 낙인 테헤란로 직장인이다.

예술의전당 웹진 편집팀에서 여섯 편의 에세이를 엄선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정작 중 그림을 통해 꿈을 키우고 시련의 시간을 견뎌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두 편을 소개합니다.
예술의전당 웹진 편집팀에서 여섯 편의 에세이를 엄선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정작 중 그림을 통해 꿈을 키우고 시련의 시간을 견뎌낸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두 편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