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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놀이를 되찾으면 진정한 자신이 된다

1101 어린이라운지 참여 작가
에르베 튈레 인터뷰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광재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튈레의 책들은 늘 어린이 책의 추천 코너에 눈에 띄게 진열돼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뉴욕타임스」가 ‘유치원의 황태자(the prince of preschool)’라 이름 붙인 책은 『Un Livre(Press Here, 책 놀이)』. 책 속에는 노랑·파랑·빨강의 크고 작은 원들이 구르듯이 배열돼 있는데, “이곳을 누르세요”, “다음 장으로 넘기세요”, “잘했어요 하지만 조금만 더 세게 문지르세요” 등등 적힌 대로 따라 한 후 책장을 넘기면 동작에 맞추어 동그라미들의 위치나 색, 크기가 바뀐다.

쉽고 단순하며 서사가 없는 그림책에 아이들은 열광했다. 디지털 화면 터치에 익숙한 아이들조차, 종이를 문지르거나 책을 흔들어대는 상상의 현실에 빠져들었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베스트셀러 목록에 4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튈레가 밝고 경쾌한 색으로 그려낸 인터렉티브 그림책은 지금껏 80여 권이 출간됐고,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아무거나’가 전하는 행복의 시간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술의전당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튈레의 1101 어린이라운지 워크숍 역시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아이들이 결과물을 만드는 방식은 새로웠다. 튈레는 하얀 종이 한 장에 동그라미, 지그재그, 체크 같은 패턴들을 자유롭게 그린 뒤 “여러분도 그려보라”고 주문했다. 아이들은 찌그러진 원에 선을 더하고 되는대로 색을 배열했다. 당연히 불규칙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작업을 위한 종이의 한가운데에는 테이프가 길게 붙여져 있었다. 종이 위에 마음껏 아무것이나 그린 후 테이프를 뜯어 반대 방향으로 붙이면 예상하지 못한 형태가 나왔다. “애써 그려서 그걸 뜯는다고?” 망설이던 아이들은 곧 테이프가 찢겨 나가는 느낌을 즐겼다. 이후에는 큰 종이의 중앙에 구멍을 내서 이미 패턴이 그려져 있는 종이와 결합해보고, 중간중간 칼집이 난 큰 종이에 다른 작품을 마구 찢어 끼워 넣는 식으로 작품을 완성해갔다.

네 가지 작업의 공통점은 아이들이 무언가를 그리면서도 어떻게 완성될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거나, 아무 색으로나 그리라”는 튈레의 말은 아무래도 생소했다. 튈레는 예전 인터뷰에서 “나의 목표는 영감과 작품 사이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그의 영감과 아이디어는 즉각적이고 즉흥적으로 완성작이 된다. 이런 방식을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튈레의 속도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영감과 작품 사이 경계를 없애는 것을 강조하는 에르베 튈레. 그의 철학을 담아낸 아이들의 다채로운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이광재

튈레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아이들이 자유롭게 만든 작품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곳 앞에서 진행됐다. 그에게 물었다. “보통 미술을 배운다고 하면 특정한 모습을 잘 그리기 위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당신의 워크숍은 달랐다.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인가?” 튈레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숫자 세는 것, 글자를 세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들을 과거로 데려가는 것이다.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정해지지 않은 행동을 하던 아기 시절로 돌아가게 하는 것, 그 당시의 어딘가와 통하는 것만으로 아이들은 안심하고 행복해할 수 있다.

배우 박정자는 카리스마의 대명사다. 강렬한 눈빛과 중저음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그의 연기를 보면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책으로 잘 놀게 하는 아이디어

튈레는 어린이 책으로 경력을 시작한 작가가 아니다. 1990년대에 프랑스 「르몽드」, 「엘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고, 에르메스의 카탈로그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4년 첫 그림책 『엄마는 어떻게 아빠를 만났을까?(Comment Papa a Rencontre Maman)』를 출간했는데, 이 책으로 1998년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 논픽션상을 받았다. 잇따라 낸 체험형(interactive) 책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이런 종류의 책에 대해 튈레는 “간단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책은 공간이고, 관련된 사람은 둘이다. 나와 독자. 공간에서 두 명이 즐겁게 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해봤다. 독자들 모두가 똑같은 독서법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책을 가지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잘 놀게 할 방법을 고안했다.”

이처럼 튈레의 이야기 대부분은 ‘놀이’로 향해 있다. 그의 어린이 워크숍은 2011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시작됐다. 이후 뉴욕 현대미술관, 아프리카 말라위 자카란다 스쿨, 도쿄도 현대미술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등으로 워크숍의 범위를 넓혔다. 튈레가 이 무정형의 워크숍을 시작한 이유는 문화를 경험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가난한 아이들, 학교나 집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문화를 접할 통로를 만들고 싶었다. 특히 그 지역의 학교 선생님, 도서관 사서에게 즐거운 놀이 방법을 전수해준다면 좋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내가 없어도 워크숍이 진행될 수 있도록 스타일을 만들었다.”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독자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잘 놀게 할 방법을 고안한다는 에르베 튈레  Ⓒ이광재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워크숍에 참여한 아이의 작품. 아이들은 부담 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놀이처럼 표현해낸다.  Ⓒ이광재

작가 대신 아이들의 행복을 담은 전시

튈레는 “아이들의 그리기는 모양과 색에 대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에 대한 것이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이걸 자연스레 풀어놓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그는 “무엇보다 아이들을 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학업이나 노동 때문에 그러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아이들의 가장 큰 의무는 신나게 노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곳곳의 아이들은 놀지 못한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다르지 않다.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고, ‘나도 크면 저렇게 되겠지’ 생각하면서 행복을 제한받는다.”

튈레는 “그럴 때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걸 해봐’라고 하면 아이들은 안심하고 행복해한다”고 덧붙였다. 그림책의 밝고 싱싱한 색채, 유머러스한 내용과 달리 튈레는 “나의 어린 시절은 전혀 재미가 없었고, 놀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아이들에게 놀 기회를 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렇기에 그의 투정 같은 고백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대형 서점에 가면 에르베 튈레의 알록달록한 그림책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에르베 튈레가 이끄는 워크숍에서는 그의 작품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아이들의 자유로움이 만들어낸 놀라운 결과가 벽면 가득 붙어 있다.  Ⓒ이광재

그는 이렇게 작업한 일반인들과 아이들의 자유로운 작품으로 구성된 <이상적 전시(Ideal Exhibition)>를 기획했고, 지난해에만 100회 이상 이 전시를 진행했다.

“사람들이 작업한 것을 보면 놀란다. 아주 단순한 재료와 아이디어, 궁극의 자유로움을 가지고 그룹으로 작업하다 보면 놀랄 만한 결과들이 나온다.”

<이상적 전시>에는 정작 튈레의 작업이 없다. 그는 “수십 년 작품 활동을 한 후에 도달한 개념이 바로 ‘내가 없는 전시’였다”고 했다.

나 자신이 돼보는 과정

아티스트로서 튈레는 특정한 경험을 하며 살아간다. “나의 영감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나온다. 어떤 순간에 창조적 생각이 들면 주위의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이기적일 수 있을 정도로 나 자신만 존재한다. 그 무의식중에 갑자기 변주가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큰 희열이다.” 지금까지 튈레의 독특한 그림책과 유머러스한 작품들을 만들었던 것이 바로 그 순간이다.

튈레는 “워크숍과 <이상적 전시>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내가 경험한 순간들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티스트가 아닌 사람에게 이러한 경험은 무엇을 의미할까.

“어떤 예술작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런 순간과 활동이 문화에 접근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책에 접근하면 도서관에 가게 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책을 읽게 되는 것과 같다. 자신만의 시각으로 뭔가를 하고 나면 미술뿐 아니라 음악이나 역사, 모든 것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튈레는 “이런 작업은 예술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나 자신이 돼보는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고 부연했다. 예술의전당 1101 어린이라운지와 튈레의 협업은 6개월 동안 계속되며, 워크숍 또한 이어진다.

김호정 중앙일보 문화팀 기자, JTBC <고전적 하루> 진행자
김호정은 중앙일보 문화팀에서 음악ㆍ공연 등을 담당하고 있으며 JTBC의 음악 프로그램 ‘고전적하루’, 유튜브 ‘유못쇼’ 진행자다. <덕수궁 음악회>, <실험실 콘서트>, 고양문화재단 <마티네 콘서트> 등을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