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TALK

국립현대무용단 남정호 예술감독의 기억 한 편
‘아! 아비뇽’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①

외부활동이 제한받는 팬데믹 시대. 국내 유명 아티스트들의 여행 이야기 시리즈로 그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함께 떠나는 랜선 여행!

아비뇽과의 첫 만남

코로나19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면 가고 싶은 곳이 꽤 있지만 그중에서도 프랑스 아비뇽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곳에 지금까지 네 번을 방문했는데, 희안하게도 그 안에 있을 때는 천하를 가진 것 같다가 떠나면 금방 그리워지는 도시가 바로  아비뇽이다. 첫 방문은 1981년 여름이었다. 미국의 무용가 로라 딘 워크숍이 아비뇽에서 열릴 예정인데 오디션을 거쳐 뽑힌 이들에게는 무료 참여 기회와 저렴한 숙식을 제공한다는 조건을 내건 프랑스 직업무용수복지센터의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파리에서 진행된 그 오디션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름휴가를 아비뇽에서, 게다가 거의 무료로 보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내로라하는 프로 무용수들까지 참여했다. 대단한 투지로 가득 찬 순간이었다. 다행히도 로라 딘이 제시한 오디션 과제가 나에게는 부담스럽지 않아 마지막 15명 안에 남게 되었고 바로 수속을 마친 뒤 아비뇽으로 향했다.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①

유럽을 대표하는 문화도시, 프랑스 아비뇽.

워크숍을 통한 수련과 치유의 시간

로라 딘은 미니멀 아티스트로서 그의 움직임 대부분을 돌기(Turn)로만 구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웬일인지 도는 것만은 자신 있었기에 이 워크숍 기간을 통해, 그동안 까다로운 프랑스 선생님들의 수업을 받으면서 생긴 열등감을 꽤 치유할 수 있었다. 오래된 수도원에 거처하면서 기도하는 수피 춤과 같은 이 수련은 불안과 고독을 짊어지고 있던 이방인인 나를 정신적으로 위로해주었고 2주 뒤 워크숍이 끝날 무렵 로라 딘이 자기 무용단의 무용수로 입단 제안을 해왔을 때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최상의 영예를 안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해본다. 그때 파리의 장-고당무용단을 떠나 뉴욕의 로라 딘에게 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당시의 수확은 무궁무진했다. 나는 굶주린 아이처럼 그해 아비뇽페스티벌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을 먹어치웠다. 교황청 야외무대에서 한밤중에 본 카프카의 <성(Castle)> 그리고 피나 바우슈의 <콘탁트호프(Kontakthof)> 공연도 난생처음 관람했고, 이 경험과 무대는 차후 나의 공연에 대한 시각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해주었다.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①

14세기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구 교황청 궁전 앞에서는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초청 아티스트로 참여한 아비뇽페스티벌

그다음은 1998년 아비뇽페스티벌의 공식 초대작으로 선정된 <한국인들(Les Coreennes)>의 초청 아티스트로 참여하여 방문했다. 공연 장소는 연극 연출가 피터 부룩이 인도의 설화를 모티프로 만든 연극 <마하바라타>를 발표해 유명해진 불봉극장(Carriere Boulbon)이었다. 채석장에서 극장으로 변신한 불봉극장은 높이 40미터의 돌이 병풍처럼 둘러싼, 바깥 세계와는 격리된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4시간 여에 걸쳐 한국 공연예술의 전통과 현대를 소개하는 이 프로젝트는 고(故) 강준혁 씨가 예술감독을 맡았다. 이매방, 안숙선, 김덕수, 고(故) 김대환, 강태환, 시나위, 국립국악원 등도 대거 참여한 한국 공연예술의 자존심을 건 대규모 프로젝트였으며, 나의 독무 <신부>는 강태환의 색소폰 연주와 함께 후반부에 공연됐다. 일주일간의 공연이었지만 준비 기간을 합쳐 2주 동안 머무르면서 그때까지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한 초청 아티스트로서의 대우를 받았고, 가장 큰 소득은 함께하는 전통 예술가들의 재능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우리 전통의 역동성과 섬세함을 소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마 이 프로젝트 이후가 아닐까 싶다.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①

<한국인들> 공연에 함께 참여한 이혜경 씨와 아비뇽 거리를 거닐다가 한 컷.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①

<한국인들> 공연 후 팬이 된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았을 당시. 왼쪽부터 남정호, 안숙선, 고(故) 김대환, 집주인 부부, 이혜경.

여유로움을 안겨주는 도시, 아비뇽

아비뇽과의 세 번째 만남은 2012년 매년 겨울 아비뇽에서 열리는 무용축제 (L’hivernale de Danse)에 즉흥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 <Pas de Quatre>의 리더로 참여하며 이루어졌다. 함께한 이들은 작년에 작고한 콘트라베이스 주자 사이토 테츠(Saitoh Tetsu), 피나 바우슈 무용단 전 멤버 장 로랑 사스포테스(Jean-Laurent Sasportes), 한국 음악가 원일 그리고 남정호. 두 명의 뮤지션과 두 명의 춤꾼이 벌린 즉흥 춤판이었다. 기획 없이 내가 모든 뒷바라지를 하며 공연을 준비하는 상황이었지만 참여자 모두가 ‘프로’들인지라 지혜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여름에 열리는 아비뇽페스티벌 때와는 달리 외부인이 많이 없는, 현지인들의 도시로 돌아온 아비뇽을 만날 수 있었다. 겨울방학 기간이라 일정에도 쫓기지 않았으므로 함께한 이들과 즉흥의 매력을 충분히 공유하며 일생에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비뇽이라는 도시를 오랜만에 방문한 친정처럼 편안하게 느끼며 끼니때마다 맛집을 찾아가는 즐거움과 다른 이들의 공연을 관람할 여유를 만끽했던 유쾌한 기간이었다.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①

아비뇽에서는 연극, 무용 등 세계 예술가들의 다양한 공연이 매해 열린다.

그리고 최근 2017년 여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프랑스 5개 남부지역 순회공연으로 기획된 <레드 서클(Red Circle)>의 공연 책임자로 이 도시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프랑스 안무가 얀 뢰르의 안무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창작과 학생들이 출연한 야외공연이며, 2016년 한불수교 130주년 기념으로 시작되어 2018년에 마무리를 한 것이다. 프로 무용수가 아닌 학생들로 이루어져 결국 아비뇽에서는 공연할 수 없었지만 몽펠리에 공연 후 잠시 일정이 빈 날에 굳이 아비뇽을 방문하는 계획을 세웠다. 달갑지 않은 인솔 교사를 자처하며 익숙지 않은 야외공연에 지친 학생들을 아비뇽에 몰고 간 이유는 빤하지 않은가. 아무리 피곤해도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뇽과의 재회를 기다리며

아비뇽 거리의 축제 열기에 빠져드는 학생들을 흐뭇하게 보다가 갑자기 한국무용단의 공연 소식을 들었다. 국립현대무용단과 벨기에 리에주극장이 공동제작한 공연은 연일 전석 매진이라고 했다. 애슐린 파롤린 안무가의 작품 <나티보스(NATIVOS)>였다. 한국에서 초연할 때 별 감흥 없이 본 작품이었는데 장소를 바꾸어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판단이 옳았다. 4명의 무용수가 숨이 넘어갈 때까지 춤추는 것을 보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의 본성을 좀 왜곡된 시선을 가진 타자에 의해 지적받는 불편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객석의 진지한 열기에 전부 보상을 받았다. 그해 말에 벨기에 평론가가 뽑은 최고의 무용작품상을 받았다고.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①

예술과 아름다운 자연이 여행자에게 손짓하는 아비뇽.

아비뇽에 가면 항상 좋은 일이 생긴다! 언젠가는 아비뇽페스티벌이 열리는 한 달간 꽤 괜찮은 숙소를 얻어서 그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다. 시간과 돈에 쫓기지 않고 모든 공연 표를 예매해놓고 낮에는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밤에는 차려입고 공연을 보러 가야지. 공연이 없는 날에는 시장에 가서 각종 치즈, 와인, 남프랑스의 태양에 무르익은 과일, 야채를 사 와서 차려놓고, 인생 노을의 찬란함을 예찬하는 시간을 가질 자격이 충분한 나의 친구들과 함께 파티를 열 것이다. 갓 구운 바게트는 필수!

글 남정호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삶의 고민과 예술의 고민을 구분하지 않으려 하며 반세기에 걸쳐 해온 무용인의 경험으로 안무와 그 원천 자료인 ‘즉흥’을 연구하고 때로는 저술 활동도 하면서 무용의 매력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기간 2020.10.30(금)
시간 7:30PM
장소 콘서트홀
관람등급 8세 이상 관람
관람시간 120분
장르 클래식 음악
가격 R석 10만 원 / S석 8만 원 / A석 6만 원 / B석 4만 원
주최 예술의전당, 한겨레신문사
문의 02-580-1300

※ 본 공연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한 좌석 띄어 앉기‘로 객석을 운영하오니, 예매 시 참고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