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지켜보는 아그네스가 아닌
우리 곁 이야기처럼 공감하는 아그네스로

연극 〈신의 아그네스〉
11.7(토)~11.29(일) | CJ 토월극장
연극 〈신의 아그네스〉 무대의 주역들.

‘원장수녀’ 윤소정·박정자·양희경·이정희, ‘닥터 리빙스턴’ 이정희·손숙·연운경·윤소정, 그리고 ‘아그네스’ 윤석화·신애라·김혜수·전미도….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거쳐 간 우리 무대 스타들의 이름이다. 극단 실험극장이 윤호진의 연출로 340회 공연이라는 신화를 쓰고 윤석화라는 스타를 낳은 1983년 초연 이래, 숱한 연출가와 배우가 이 작품을 새롭게 읽어내어 새로운 무대 위에 펼쳤다.

<신의 아그네스>가 11월 7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번엔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양자역학 이야기로 불확정적 세계의 모습을 그렸던 <코펜하겐>의 연출가 윤우영이 연출을 맡았다. 닥터 리빙스턴 박해미, 원장수녀 이수미, 아그네스 이지혜의 진용. 이수미는 극단 ‘목화’ 출신으로 <처의 감각>, <텍사스 고모>, <자기 앞의 생> 등에 출연해온 천생 연극배우다. 최근 <슬기로운 의사생활>, <그 남자의 기억법> 등 드라마와 영화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지혜는 박정희 연출의 <얼굴도둑>, 부새롬 연출의 <그 개> 등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수미, 이지혜 두 배우를 만났다.

가 11월 7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수미, 이지혜 두 배우를 만났다.

원장수녀 역의 이수미, 아그네스 역의 이지혜(왼쪽부터). ⓒ이보영

Q. <신의 아그네스>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이수미(이하 ‘수미’) 박정자·손숙·신애라 배우가 출연한 작품을 1992년 산울림에서 봤다. 원장수녀 박정자 선생님이 보여주신 엄청난 카리스마, ‘나가라’ 하실 때의 손짓, 그리고 손숙 선생님이 대사를 하실 때 온몸이 울려서 갈비뼈 옆의 횡격막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솔직히 오래전이라 기억이 어렴풋하다. 원장수녀 대사가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뇌혈관이 다 터질 지경이다, 하하.

이지혜(이하 ‘지혜’) 국내 초연은 제가 태어나기 한참 전의 일이다. ‘예전 연극 아닌가?’ 생각했던 것 같다. 가정폭력을 겪은 어리고 여리고 착한 ‘피해자’ 아그네스. 솔직히 그런 전형적 역할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들여다볼수록 세 인물이 입체적이고, 구조적으로 잘 짜인 여러 가지 면을 갖고 있다. 나약하고 연약하고 늘 아프지만, 오히려 고집 있고 성질이 아-주 더러울 수도 있는, 아그네스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드리고 싶다.

가 11월 7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수미, 이지혜 두 배우를 만났다.

수녀원 영아살해 사건의 진실을 밝혀가는 스토리를 다룬 <신의 아그네스>.

Q. 윤우영 연출가와의 작업은 어떤가?

수미 대본을 함께 꼼꼼히 읽으며 생각을 모아가고 있다. 연출과 배우는 멋있다고 생각하는데 관객이 벽을 느끼는 일은 없도록,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짚어가면서 관객 한 사람 한 사람과 더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 극 중 세 여자는 각자 다른 상처를 갖고 있고, 서로가 그 상처를 비추는 거울 같다. 원장은 아그네스에게서 어릴 때 지키고 싶었던 순수함을 본다. 닥터는 아그네스를 통해 자신이 구원하지 못했던 어린 동생을 보고, 원장에게서는 지긋지긋했던 엄마를 본다. 연출님은 ‘예전엔 이랬다’가 아니라, 지금 이 작품 안에서 닥터와 원장과 아그네스가 어때야 하는지 함께 찾아가주신다. ‘함께’, 이게 중요하다.

지혜 배우를 믿는 연출님이다. 배우의 것, 개성을 살려주신다고 할까. ‘이렇게 하라’고 몰아가는 게 아니라 북돋우고, 도움말을 얹어주신다. 이 작품을 통해 여러 스타가 탄생했던 이유가, ‘배우가 잘 보이는 연극’이어서인 듯싶다. 제가 “이건 어떨까요?” 조심스레 말씀드리면, “그래 한번 해보자고!” 하신다. 그 말씀이 제일 좋다.

가 11월 7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수미, 이지혜 두 배우를 만났다.

팽팽한 긴장감이 도는 아그네스와 원장수녀의 연습 장면.

Q. 무대에선 고전도 늘 재해석·재창조된다. 이번 무대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지혜 이전 무대를 봤다면 강렬하게 남아서 저를 가뒀을 것 같다. 딱딱하고 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우리 이야기로 들리게 하고 싶다. ‘쉽게’가 아니라 관객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닥터와 원장 이미지도 예전과 다르다. 닥터는 아그네스 어깨를 툭 치며 친근한 모습도 보인다. 원장도 강인함뿐 아니라 인간적이고 푸근한 면모를 동시에 가졌다. 그런 면에서 관객이 더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무대가 되지 않을까.

수미 소박하지만, 욕심이 있다. 지켜보는 공연보다, 공감하는 공연을 하고 싶다. 결과는 막이 올라가야 알 수 있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Q. 이수미의 원장수녀는 어떤 인물인가?

수미 이전에 원장수녀를 연기한 선생님들이 엄청난 카리스마와 에너지를 보여주셨다. 그럼 배우 이수미는 좀 다른 느낌으로 멋있는 배우로 보여야 하나 아니면 인간 이수미가 보여야 하나, 고민했다. 작품을 읽으면서, 역시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게 됐다. 결혼하고, 남편이 죽고, 내가 낳은 자식들이 나를 미워하는, 수녀원 오기 전엔 하루 두 갑씩 담배를 피웠던 사람. 뭘까, 이 사람의 삶은. 음침하고 가두는 수녀가 아니더라. 원장수녀는 “하늘을 올려다봐요. 신은 거기에 없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마지막에는 박사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다. 나한테서 가장 소중한 걸 빼앗아 갔기 때문에. 당신은 죽어야 한다. 당신 동생이 아니라 당신이.” 수녀가 이런 말을 할 때, 이 사람은 잠깐 신을 떠난 것이다. 그게 오히려 더 인간적인 모습이다. 어떤 신앙으로 포장돼도 이 사람 가슴은 용광로처럼 끓고 있는 거다. 무대에서 이런 대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가 11월 7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수미, 이지혜 두 배우를 만났다.

원장수녀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배우 이수미. ⓒ이보영

Q. 이지혜의 ‘아그네스’는 어떤 인물인가?

지혜 인물에 다가가려 애쓰다 보니, 조금씩 와닿는 부분들이 생긴다. 워낙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이다. 닥터가 억압적 엄마에 대한 환상을 끄집어낸 뒤 아그네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 아그네스가 “정말 나를 사랑하세요?” 하고 묻는다. ‘이 아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구나’, ‘사랑받기 위해서 예쁘게 보이려고 하고, 그렇지 못했을 때 그걸 죄라고 생각하며 발작 반응을 보이는구나’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아그네스는 십수 년간 집 안에 갇혀서 엄마와 살았다. TV도 안 봤고 친구도 학교도 없었다. 엄마와 엄마가 해주는 얘기가 자기 세계의 전부였다. 어린 시절을 그렇게 갇혀 지냈으니, 순수하고 맑지만 동시에 병적인 부분들도 생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가 11월 7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수미, 이지혜 두 배우를 만났다.

아그네스의 다양한 얼굴을 표현하는 배우 이지혜. ⓒ이보영

Q. 이 연극, 오랫동안 여자들의 <에쿠우스>라 불렸다. 동의하나?

지혜 둘 다 좋은 작품이고, 비슷한 면이 있지만, 굳이 ‘여자들의’이라는 표현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수미 20년 전이면 영광스러운 별명이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시점이니까.

지혜 물론 여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엄마이자 딸이자 아내인.

수미 여자 배우 셋이 무대에 서면 어쩐지 부족할 것 같은 고정관념이 있다. 이제 그런 구분을 떠나서 진정성과 에너지로 관객과 맞닥뜨려야 한다. 자유소극장도 아닌, CJ 토월극장 무대를 우리 셋이 꽉 채워야 한다.

가 11월 7일 다시 무대에 오른다.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수미, 이지혜 두 배우를 만났다.

2020 <신의 아그네스>를 통해 연극의 가치를 전하고 싶은 배우들. ⓒ이보영

Q. 코로나19 시대, <신의 아그네스>를 보러 오는 관객들에게.

지혜 빨리 변하고, 혼란스럽고, 그 와중에 갈등도 상처도 많다. 극장이 그런 상처를 좀 보듬어주고, 우리 속을 좀 긁어주고, 영혼을 다독여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것들이 연극이 할 수 있는 지점인 것 같다. 특히 <신의 아그네스>는 더욱이나 그런 위안을 줄 수 있는 작품 같다. 마음 요란하지 않게,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을 잘 해내길 간절히 기도하고 소망하고 있다.

수미 1년 동안 묵직한 질문들이 우리 안에 있었다. 연극이 숭고하고, 배우라는 직업이 숭고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 멈춰선 세상을 바라보며 ‘숭고하지 않을 수도 있나’, ‘연극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건가’ 고민이 들었다. 연극이 오래된 방구석 먼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 사는 데는 연극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걸 보여드릴 수 있는 무대가 되면 좋겠다. 분명한 건 이 작품 끝난 뒤의 이수미는 이전의 이수미와 다를 것 같다. 무대에서 더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버틸 힘이 생기지 않을까. 그걸 기대하고 있다.

사진 이보영, 예술의전당

이태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종교, 미술, 영화 등을 거쳐, 지금은 공연을 담당한다. 짧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시대여도 여전히 굵직한 이야기의 힘을 믿으며, 글이 무대와 관객을 이어주길 소망하며 쓴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

기간 2020.11.7(토)~2020.11.29(일)
시간 화, 목, 금 7:30PM/ 수, 일 3PM/ 토 2PM
* 매주 월요일, 11.20(금), 11.21(토) 공연 없음.
장소 CJ 토월극장
관람등급 14세 이상
관람시간 120분
장르 연극
가격 R석 8만 원/ S석 6만 원/ A석 4만 원
주최 예술의전당, 한울엠플러스(주)
문의 02-580-1300

※ 본 공연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한 좌석 띄어 앉기’로 객석을 운영하오니, 예매 시 참고 부탁드립니다.

체험형 키즈오페라를 만들어낸 안주은의 연출 노트.
체험형 키즈오페라를 만들어낸 안주은의 연출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