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TALK

이탈리아 석굴 도시 마테라에서의 영감
‘수치를 인정하라, 영혼이 해방되리라’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③

어느 곳이든 자세히 들여다봐야 제대로 보이는 법. 업무 일정에 쫓기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혹은 느끼지 못했던 낯선 곳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다. 이종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이 이탈리아 마테라(Matera)에서 한 뜻밖의 경험을 들어본다.

기억 속 이탈리아 마테라를 떠올리다

코로나19 ‘탓’인지 ’덕분‘인지, 지난 2월 중순 일본 요코하마댄스컬렉션에 다녀온 이후로는 얌전히 서울에서 근신하고 있다. 때마침 허리 통증까지 도져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라”는 저 높은 곳의 명령이 아닌가 싶었다. 촘촘히 잡혀 있던 외국 행사 참관 일정들이 도미노처럼 착착 쓰러졌다. 아울러 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 이하 시댄스)도 외국단체 초청이 차례차례 취소, 국내 팀 공모, 유관중에서 무관중으로 공연 방식 변경, 영상 온라인 진행으로 최종 결정…. 휴우, 이렇게 휘둘리며 정신없이 한 해를 보내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니던 외국 축제의 풍경들이 서서히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허리도 그럭저럭 견딜 만해 어딘가로 또다시 떠나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의무감(?)이 들기 시작하는데…. 이에 때맞춰 예술의전당 웹진 ‘아티스트들의 여행 시리즈’ 기고 요청을 받고 편집진의 탁월한 타이밍 감각에 경탄으로 반응하면서 작년 3월 이탈리아 여행(이라기보다는 출장)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최근 이탈리아 무용계와 시댄스 간의 교류가 부쩍 늘어나면서 작년 상반기에만 세 차례나 다녀왔는데, 그중에서도 남부 바실리카타주의 중심도시 마테라의 인상이 단연 압권이었다.

어느 곳이든 자세히 들여다봐야 제대로 보이는 법. 업무 일정에 쫓기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혹은 느끼지 못했던 낯선 곳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다. 이종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이 이탈리아 마테라에서 한 뜻밖의 경험을 들어본다.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이 펼쳐지는 마테라.

‘이탈리아의 국가적 수치‘에서 ’유럽문화수도‘로

마테라는 불가리아의 플로브디프와 함께 ‘2019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돼 1년 내내 많은 행사를 펼쳤다. 그중 이탈리아의 중진 안무가 실비아 그리바우디의 <인간의 수치심(Humana Vergogna)>을 꼭 보러 오라는 제작총괄 프란코 운가로의 초대로 마테라에 가게 됐다.
마테라는 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석회암 동굴에서 살았던 석굴 주거지역으로, 근대 이후 산업의 부진과 낙후한 생활상, 극심한 빈곤과 질병의 만연으로 인해 한동안 ‘이탈리아의 수치’로 불렸던 지역이다. 1952년 마테라 개발정비 법령이 통과되자 정부가 주민들에게 이제는 석굴 밖으로 나오라며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면서 환경이 많이 바뀌었고 지금은 매력적인 관광지로 완전히 변신했다. 축전을 주관하는 마테라-바실리카타재단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 만장일치로 행사 주제를 ‘수치(Shame, Vergogna)’로 정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수치로 여겨지던 석굴 주거지역의 풍경들. ©이종호

언젠가 읽었던 카를로 레비의 구절들(정확히는 그가 쓴 부분과 인용한 부분이 섞여 있다)이 떠올랐다. “관광안내 책자에서 마테라는 고대미술 박물관과 원시시대 주거가 남아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라고 읽었다. 하지만 역에서 내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현대적이고 사치스러운 건물 한 채. 아무리 둘러봐도 ‘도시’는 없었다. 작은 산들로 둘러싸인 황량한 고원, 헐벗은 산들과 풀 한 포기 없는 언덕, 돌만 굴러다니는 회색빛 땅, 아찔한 계곡 밑으로는 작지만 격랑으로 굽이치는 개천, 도대체 문화나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곳.

어느 곳이든 자세히 들여다봐야 제대로 보이는 법. 업무 일정에 쫓기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혹은 느끼지 못했던 낯선 곳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다. 이종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이 이탈리아 마테라에서 한 뜻밖의 경험을 들어본다.

돌을 깎아 만든 오래된 마을의 동굴 집 내부.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만나게 되는 동굴 집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비참했다. 동굴을 집으로 쓰고는 있지만 출입문이 아예 없거나 천장에 문을 만들어 드나드는 곳도 많았다. 어린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중 상당수는 말라리아에 걸려 바닥에 누워 있었다. 넝마 같은 이불과 옷들이 각종 오물과 함께 바닥에 널려 있었고, 반쯤 감긴 아이들의 눈 위로 앵앵거리며 날아다니는 모기들, 그래도 이방인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하며 들어오라고 권하는 아낙네들. 그들의 앞가슴은 한결같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돈을 조금씩 나눠주었다. 뭐라도 사 먹으라고. 그런데 아이들이, 나중에는 어른들까지 합세해서 계속 밑으로 내려가는 나를 쫓아오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돈을 더 달라는 건가? 발길을 멈추고 서서 귀를 기울였다. “키니네, 키니네… 키니네 주세요.” 글을 읽으면서 키니네가 우리도 어린 시절에 들어봤던 말라리아 치료제라는 걸 아주 오랜만에 기억해냈다.
3월 5일 오후에 석굴 지역을 몇 시간 구경하고 나서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장은 감옥(!) 안에 있었다. 중학생 시절 처음으로 삼일당에서 음악회, 명동국립극장에서 연극을 본 이래 지금까지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 산사(山寺)와 성당, 운동장이나 강당, 심지어는 비좁은 아파트 거실(나폴리알토페스트축제) 등 각종 장소에서 공연을 봐왔지만(요즘은 사이트 스페시픽이 유행이라 공연 장소를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고) 감옥에서 공연을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수치심에서 해방되세요!

연기자·무용수 5명이 열연을 펼치는 <인간의 수치심>은 연기, 춤, 대사가 속도감 있게 얽히면서 수치심의 다양한 종류와 양상을 부담 없이 보여준다. 갖가지 동작과 우스꽝스러운 대사들은 때로는 재미있게, 때로는 서글프게, 그러나 결코 공격적이지 않게 관객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개인의 수치에서 집단과 국가의 수치까지, 무겁고 심각한 주제를 가볍고 즐거운 일종의 자기역설(自己逆說)로 치환하면서 매 장면, 매 순간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공연 후 식당에서 만난 실비아가 앉자마자 고백했다. “사실 나도 몸이 뚱뚱해지면서 무용수로서 수치와 절망감을 느꼈고, 그래서 ‘수치 프로젝트’ 제안이 왔을 때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실비아만이 아니라 수치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종류도 아주 많다. 외모, 가정환경, 가난, 성적 수치심, 사회적 무능력 등등. 어떻게 하면 수치에서 벗어나 평온과 자신감에 이를 수 있을까. 작품은 1시간여의 격렬하고 재미나고 웃기는 무대를 통해 마침내 아주 쉬운 결론에 도달한다. 수치에 솔직해지는 것,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 그렇다, 그것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공연이 끝난 후 영상으로 소개된 이곳 재소자들의 관람 소감에도 그런 결론이 드러난다. “이제 감옥에 있다는 것이 그다지 창피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나 스스로를 더욱더 사랑하고 존중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등.

그렇다. 수치를 뒤집어 보이면 부끄러울 것도 없다. 피렌체에서 온 평론가 톰마조 키멘티의 표현처럼 “수치심이야말로 진짜 형틀이다(La vergogna è la vera gogna)“.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연결한 재치. 나름 명언이다. 수치심에서 스스로 해방되면 비로소 무한한 가능성이 열리리라. 사회생활을 하면서 종종 부딪히게 되는 열등감 환자들을 보면 꼭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열등감 환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을 인정하거나 그를 능가하기 위해 노력하면 될 터인데, 오로지 그를 방해하고 모략하는 데서 많은 문제가 생겨나니 말이다.

뜻밖에 만난 석굴 수도원의 달리

마테라 석굴 지역의 갖가지 모습도 경이로웠지만, 석굴 수도원에서 열렸던 살바도르 달리의 특별전시회를 볼 수 있었던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거의 횡재한 기분. 아래층과 위층처럼 붙어 있는 마돈나델레비르투(Madonna delle Virtù)교회와 산니콜라데이그레치(San Nicola dei Greci)수도원, 그 양편으로 연결된 옛 동굴 거주지들까지 포함, 일명 ‘동굴 단지‘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는 네 가지 주제에 따라 선정된 조각과 회화 약 200점이 방문 코스에 따라 배치돼 있었다. 옥내 전시장이 아닌 이런 곳에서 달리의 조각을 보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동굴 단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만난 달리의 작품들. ©이종호

작품도 작품이지만 동굴이라는 독특한 공간에 맞춰 전시하고 배열한 ’전시연출‘이 압권이었다. 관람객들은 아래층인 마돈나델레비르투교회로 입장해 작품을 감상한 뒤 위층 수도원과 옛 동굴 집에 전시 중인 작품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그 공간에 그 작품을 배치한 주최 측의 감수성이 존경스럽다. 감상을 마친 사람들은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기도 하고, 테라스 카페에 앉아 건너편 옛 동굴 주거지들이 있는 커다란 바위산을 바라보며 커피나 포도주를 마시면서 시간을 즐긴다.

어느 곳이든 자세히 들여다봐야 제대로 보이는 법. 업무 일정에 쫓기느라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혹은 느끼지 못했던 낯선 곳을 재발견하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다. 이종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이 이탈리아 마테라에서 한 뜻밖의 경험을 들어본다.

석양에 물드는 마테라의 석굴 지역 풍경.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덧 어스름이다. 건너편 바위산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느낌이 아스라하다. 석굴 앞마당에 서 있는 조각상 뒤 넓은 바위산을 조금씩 조금씩 석양이 붉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늘 호텔과 공연장 사이만 오가느라, 사람들만 만나느라 여행이라는 기분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는 오랜만에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행 한 번에 무슨 대오각성을 하는 건 아니겠지만 분명 어떤 느낌이나 깨달음의 빌미는 되어준다. 그게 여행의 매력적인 효용이 아닐까.

이미지 제공 이종호, 셔터스톡

 이종호 서울세계무용축제 예술감독
언론인 출신의 무용 평론가/ 기획자로 1990년대 후반 유네스코국제무용협회(CID-UNESCO) 한국본부와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를 창설, 세계 무용계 주요 트렌드의 국내 소개와 한국무용의 해외 무대 진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리 예술의전당 웹진 편집팀
사진 김경훈, 셔터스톡

* 본 기사는 김경훈 사진기자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가을, 국내 유명 아티스트들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그 시간, 그 공간 속으로 함께 떠나봅니다.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사태 취재 당시 모습. ⓒ김경훈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가을, 국내 유명 아티스트들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그 시간, 그 공간 속으로 함께 떠나봅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하게 된 2018년 중남미 캐러밴(이민자 행렬) 문제 취재 당시 최루탄이 터진 현장의 취재 모습. ⓒ김경훈

저 역시 한때는 이국적인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촬영하는 것을 즐겼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 풍경을 눈으로 보고 마음속으로 기억하는 방식으로 아름다움의 여운을 간직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여행 사진에 대한 제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2004년 그리스에서 열린 아테네올림픽을 취재한 뒤 그리스의 유명한 휴양지 산토리니섬을 여행한 것이 그 계기였습니다. 진한 물감을 풀어놓은 듯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파란 지붕과 순백색의 담벼락으로 지어진 집들이 빚어내는 풍경이 아름다운 산토리니섬. 어쩌면 여행 사진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여행을 가서 멋진 사진을 남기고 싶은 곳일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기에 며칠간의 짧지 않은 여정 중 긴 시간을 할애해 산토리니섬의 아름다운 석양을 배경으로 멋진 풍경 사진 찍기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나름 좋은 사진을 촬영했다고 생각했던 의기양양함은 다음 날 시내의 조그만 기념품 가게를 찾아간 뒤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돈으로 장당 몇백 원에 판매하는 기념엽서들 속에는 내가 촬영한 것보다 몇 배는 멋지고 아름다운 사진들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행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은 누구보다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경쟁도 아니고 오롯이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이지만 짧은 여행이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마주하고 싶은 것을 희생해가며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찍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행위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경험이었습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기간 2020.10.30(금)
시간 7:30PM
장소 콘서트홀
관람등급 8세 이상 관람
관람시간 120분
장르 클래식 음악
가격 R석 10만 원 / S석 8만 원 / A석 6만 원 / B석 4만 원
주최 예술의전당, 한겨레신문사
문의 02-580-1300

※ 본 공연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한 좌석 띄어 앉기‘로 객석을 운영하오니, 예매 시 참고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