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INT

제자리에 있는 듯 전진하는 세계

2020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12.19(토)~12.27(일) | 오페라극장
러시아의 〈호두까기인형〉 공연 장면. ⓒPavel L Photo and Video/ 셔터스톡

혼란스러운 나날 중에도 <호두까기인형>의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매년 지겨운 돌림노래라고 질타당했지만 올해만큼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돌아온 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늘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파격적인 설정으로 원작을 갈아엎은 현대적인 버전도 다채롭지만, 고전발레 버전도 이에 못지않다. 고전발레 <호두까기인형>이 다양한 버전으로 파생되는 이유는 뭘까?

클라라는 몇 살인가

<호두까기인형>의 버전이 다양하게 파생된 큰 이유는 작품에 내재된 딜레마, 즉 어린이가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이다. E. T. A. 호프만의 동화를 각색하고 마리우스 프티파와 레프 이바노프가 안무한 발레 <호두까기인형>(1892)은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받은 클라라가 인형들과 힘을 합쳐 쥐 떼를 물리치고 호두까기 인형과 함께 과자의 나라로 간다는 이야기다. 그 전에도 고전발레의 일부 장면에 어린이가 출연하는 관행은 있었지만, 주인공이 되어 극을 끌어간 적은 없었다. 초연 당시 한 러시아 비평가가 ‘발레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혹평한 데에는 열두 살짜리 클라라를 비롯해 아이들이 대거 출연했다는 점이 작용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 되면 극의 진지함을 갉아먹을 뿐 아니라 어려운 테크닉을 행할 수 없어 볼만한 춤이 없다. 이후의 버전들이 어린이 비중을 낮추는 방향으로 나아간 건 당연해 보인다.

파격적인 설정으로 원작을 갈아엎은 현대적인 버전도 다채롭지만, 고전발레 버전도 이에 못지않다. 고전발레 이 다양한 버전으로 파생되는 이유는 뭘까?

동화를 각색한 <호두까기인형>의 주인공은 천진난만한 어린이들.

초연 후 첫 주요 개정판인 알렉산더 고르스키 버전(1919)은 성인 무용수가 클라라 역을 맡고 2막의 하이라이트인 별사탕 요정 이인무까지 추게 함으로써 춤의 비중을 높이고 주인공들의 애정라인을 강화했다. 이후 바실리 바이노넨 버전(1934)은 클라라가 잠에서 깨는 에필로그를 삽입해 모든 모험이 꿈이었을 뿐이라고 설정했다. 고르스키와 바이노넨의 개정은 지금까지 많은 버전의 토대가 되었다. 관객들은, 어린이를 데리고 올지라도, 주역 무용수들의 빼어난 춤을 실컷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국립발레단이 12월 19일부터 오페라극장에서 선보이는 러시아 발레의 ‘살아있는 신화’로 불리는 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은 주역 발레리나가 어린이 클라라부터 별사탕 춤까지 춤추는 걸 원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발레 마니아들을 만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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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그리고로비치 버전
Vasiliev Maximova Nutcracker Bolshoi

특이하게도 어린이 눈높이로 역행한 흐름도 생겨났으니 뉴욕시티발레단의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버전(1954)이다. 발란친 버전은 텔레비전에서 여러 차례 방영되면서 미국 사회에서, 나아가 전 세계에서 <호두까기인형>이 연말 행사로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여기선 어린이 클라라가 주인공이고 호프만의 원작에 등장하는 드로셀마이어의 어린 조카가 호두까기 인형으로 변신한다. 1막 내내 평범한 어린이들이 싸우고 떼쓰고, 클라라와 호두까기 왕자는 과자의 나라에 가서 한껏 차려진 과자를 먹으며 어른 무용수들이 펼치는 춤을 얌전히 구경한다. 최근작인 체코 국립발레단의 페트르 주스카 버전(2017) 역시 발레 전공 학생이 아닌 어린이들이 면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으로 뛰어다닌다. 클라라와 프란츠가 내복 바람으로 침대에 누워 엄마·아빠와 함께 별사탕 요정의 파드되(고전발레에서 주역인 발레리나와 그 상대역이 추는 춤)를 구경한다는 설정은 발란친이 강조했던 가족중심적 해석의 끝판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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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발란신 버전
The Nutcracker New York City Ballet(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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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르 주스카 버전
zech National Ballet: The Nutcracker(2017)

어린이와 어른 클라라의 이분법을 피해 가는 건 어떨까. 유니버설발레단의 바이노넨 버전에선 어린이들이 출연한다. 어린이라 해도 모두 발레 전공 학생들이고 클라라는 토슈즈까지 신는 데다 중간에 어른으로 교체된다는 점에서 절충적이다.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알렉산더 라트만스키 버전(2010) 역시 어린 클라라와 호두까기 인형 커플이 서로에게 어른의 모습을 투영한다는 설정으로 어른 커플과 병치시키기도 했다. 영국 로열발레단의 피터 라이트 버전(1984)은 어린이들 속에 성인 클라라가 섞여들었는데, 몸집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리얼리티와 테크닉을 모두 잡겠다는 의욕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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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주역은 바로 호두까기 인형 부대.

이국적인 과자들

1막의 다양한 버전들이 어린이-어른의 문제, 즉 자연스러운 극과 풍부한 춤 간의 균형 잡기에서 비롯되었다면, 2막의 버전들은 음식 문화의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당장 과자의 나라(Confituremburg)의 ‘콩피튀르(confiture)’부터 우리에겐 적절한 번역어나 문화적 맥락이 없다. 과자라고 번역되어왔지만 어감으론 ‘달다구리’가 더 다가온다. 과자는 특별하고 외국 과자는 더욱 특별하다. 발레에선 이야기가 전개되기보다 볼거리 위주의 춤이 이어지는 형식을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이라고 하는데, 과자의 나라는 여러 나라의 민속춤을 나열하는 디베르티스망에 각종 먹을거리를 더하며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 스페인의 정열적인 초콜릿, 아라비아의 나른한 커피, 중국의 오묘한 차, 러시아의 활달한 막대 사탕. 모두 이국적이고 군침이 도는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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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의 낭만적인 음악 위에 다채로운 춤이 어우러지는 <호두까기인형>.

한편 먹을거리가 덜 드러나는 춤도 있다. 그러나 모두 과자 문화와 관련된 춤으로 은유적이고 언어유희적인 놀이로, 혹은 오해나 문화적 차이로 인해 파생되고 확장됐다. 미를리통(mirliton) 춤이 대표적이다. 미를리통은 갈대피리, 혹은 박(珀)과의 식물을 뜻한다는 점에서 언어유희적이고, 당시 피리 모양의 과자를 일컬었다는 점에서 문화적이다. 피리를 자주 부는 이는 양치기라는 점 때문에 양치기 소녀의 춤으로 형상화됐다. 여기에 양치기 소녀는 늑대에게 먹힐 뻔한 양을 구해준다는 설정이 더해지거나, 미를리통과 비슷한 또 다른 과자인 마지팬(marzipan: 케이크 윗부분을 덮는 아몬드 과자) 춤으로 파생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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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스키발레단 버전의 미를리통 춤
The Nutcracker-Dance of the Mirlit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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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쇼이발레단 버전의 양치기 소녀의 춤
Dance of the Merlitons–Nutcracker

많은 버전에서 생략되는 춤으로 마더진저(Mother Ginger)와 아이들 춤이 있다. 커다란 치마 속에 아이들을 숨겨서 데려 나오는 지고뉴 부인(Mère Gigogne)과 아이들인 폴리치넬(Polichinelles, 어릿광대) 캐릭터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어느새 발음이 비슷한 마더진저와 봉봉(Bonbon) 사탕이 됐다. 러시아의 과자 회사가 치마를 들추면 봉봉이 나오는 틴케이스 과자를 팔았기 때문이다. 별사탕 요정의 슈거플럼(Sugar Plum)은 건빵에 든 별사탕도, 자두와도 상관없는 설탕으로 코팅한 견과류였고, 그녀의 파트너인 코퀠루시(Coqueluche) 왕자는 무려 백일해라는 병명을 뜻하지만 아마도 당시 먹던 기침 사탕을 뜻한 것으로 추정된다. 과자와 무관해 보이는 꽃들의 왈츠 역시 원래는 설탕 입힌 캔디를 뜻했다고 하니, 이 모든 춤은 오늘날보다 훨씬 달짝지근한 뉘앙스를 풍기며 서로 어우러졌을 것이다. 무용수와 관객이 공유하는 문화적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이 춤들은 제각각의 모습으로 변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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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란친 버전의 마더진저 춤
Mother Ginger in George Balanchine’s The Nutcracker® (Pacific Northwest Ballet)

그런데 과자도 오래되면 상하기 마련이다. 초콜릿, 커피, 차, 사탕수수 등 지역 특산품의 춤은 특정 문화를 정형화하고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무용수들이 조직한 ‘옐로페이스에게 작별하기(Final Bow for Yellow Face)’라는 단체는 동양 여성을 섹슈얼한 대상으로 보는 아라비아 춤, 찢어진 눈에 베트남 모자를 쓴 동양 남성이 촐싹거리며 춤추는 중국 춤을 개정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이후 여러 버전에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체코 국립발레단의 버전이 과자의 민속춤을 아예 빼버리고 전구나 공처럼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의 춤으로 바꾼 것도 이러한 정치적인 올바름을 의식한 결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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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최고의 선물이 될 <호두까기인형>.

그러고 보면 <호두까기인형>은 늘 제자리에 머무르는 듯해도 조금씩 전진하고 확장하는 세계다.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과자가 춤추는 세계도 전진한다니 큰 위안이 된다.

이미지  셔터스톡, 유튜브, OvationTV
*모든 이미지는 본 공연과 관계없음을 밝힙니다.

글 정옥희 무용연구자
춤과 춤이 아닌 것, 무용수와 무용수가 아닌 이의 경계에 대해 탐구한다.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무용학과 초빙 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2020 국립발레단 <호두까기인형>

기간 2020.12.19(토)~2020.12.27(일)시간 화~목 7:30PM/ 금~일 2PM, 6PM
* 27일(일) 1회 공연 2PM/ 월요일 공연 없음
장소 오페라극장
관람등급 48개월 이상
관람시간 120분
장르 발레
가격 R석 9만 원/ S석 7만 원/ A석 6만 원/ B석 3만 원/ C석 2만 원/ D석 5천 원
주최 국립발레단
문의 02-580-1300

최근 코로나19 확진자의 급속한 증가세가 지속됨에 따라 12.19(토)~12.27(일)에 예정되었던 <호두까지인형> 공연이 취소되었음을 안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