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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뒤 숨은 예술가의 고백
‘피아노 조율 인생’

화려한 조명 뒤 숨은 영웅, 피아노 조율사 이종열 명장. 80세가 넘은 지금도 매년 노련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청춘과 다름없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독학으로 시작한 조율사의 길

나에게는 선배는 있으나 스승이 없다. 1956년 내가 풍금 화음에 홀려 있던 당시에는 자신이 가진 기술을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으려는 기술자 특유의 근성이 강한 시대였다. 조율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이론을 바탕으로 후배나 제자를 제대로 양성하는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나는 어느 한 선배에게 조율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간청했으나 학생은 쓸데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하라는 인정 없는 핀잔을 듣고서 독학으로 조율을 배우리라 결심하게 됐다.

내가 교회에서 반주를 맡아 사용하던 풍금이 일본 제품이었다. 그래서 일본에는 풍금 제작과 조율에 관한 책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책을 찾아서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그 당시 고3 학생이었던 나는 경제력이 없으니 부모님의 도움 없이는 책을 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전주 이 씨 양반의 가풍을 계승하는 집안인 터라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풍금 조율이라는 기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풍금 조율에 매진하던 1962년 무렵. ©이종열

당연히 반대하셨다. 게다가 소학교(일본학교)에 입학해 그해 8월에 해방을 맞았으니, 고작 몇 개월 배운 일본어 실력으로는 책을 산다 해도 읽지도, 뜻을 해석하지도 못할 게 뻔했고, 그것을 가소롭게 여기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집을 꺾지 않고 일본어 문맹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어 자습서도 준비해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풍금 연주 독학에 이어 조율을 배우기 위한 일본어 독학을 시작한 것이다.

드디어, 조율 기술을 담은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책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적한 논두렁에 주저앉아 조율 편을 읽었다. 혼자 조율 연습을 할 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들의 답을 그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참을 논두렁에 앉아 쉬지 않고 책을 읽어 내려가며 득도를 했다. 그야말로 감격의 순간. 그 기분을 누가 알까?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일본어 공부부터 조율까지 독학으로 이어온 명장의 길.

고등학교 전공이 화학이었던 나는 풍금 조율에 심취할수록 전공과는 멀어져만 갔다. 1957년 학교를 졸업하고 오직 조율에만 몰두하다가 입대했다. 첫 번째 휴가를 나와서도 오직 조율과 일본어 공부에만 빠져 있었고, 36개월이라는 군 복무기간이 허송이 될까 싶어 책을 가지고 부대에 복귀하곤 했다. 얼마 지나 그 책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탈고를 했다. 그때의 조율책 원본과 번역본, 일본어 자습서를 지금도 가지고 있지만 이제 60년이 넘는 세월에 누렇게 변색됐고 부스러져서 다루기가 조심스럽다. 1962년 제대를 하고 직업을 가져야 하는데 전공인 화학계열 취업과 조율사의 길을 앞에 두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연히 조율사였다.

세계 최고를 향한 땀과 눈물

첫 직장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수도피아노사 공장 조립부였다. 당시 고가인 피아노를 할부로 판매하게 되면서 생산이 수요를 못 따라갔다. 출근하면 야간작업자들이 만든 피아노 8대가 조율을 기다리고 있었다. 1시간에 두 대씩 조율해 낮 12시면 가까스로 피아노를 트럭에 실어 충무로 매장으로 내보냈다. 사람이 아니고 가히 기계 수준이었다.

조립 업무를 시작한 지 2년 반쯤 지나 삼익피아노 충무로 영업부로 스카우트됐다. 그곳에서 애프터서비스 업무를 하면서 실력이 조금씩 밖으로 알려져 조율사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알게 된 전문 피아니스트들의 추천으로 1980년 세종문화회관 전속 조율사가 됐다. 1970년대에 지방으로 순회 연주를 가는 피아니스트와 동행하며 공연장 조율을 이미 많이 경험했던 터라 더 어려울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세종문화회관에 저명한 해외 피아니스트들이 왔을 때는 예상했던 것보다 어려움을 느꼈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이종열 명장은 세계 최고의 조율사를 꿈꾸며 실력을 연마해왔다. ©이종열

나는 항상 한국에서 최고의 조율사가 되겠다고 생각해왔는데 다양한 해외 연주자들을 만나면서 한국에서 최고가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으로 재도약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또 한 번의 도전을 시작했다.
나는 혼자 공부했기에 자신의 수준을 스스로 평가할 수가 없었다. 조율사로서 제대로 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 선진국으로 나갔다.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 등으로 가서 조율사들을 찾아가 견학도 하며 더 좋은 기술이 보이면 배워 익혀나갔고, 그 과정에서 좋은 기술 서적들도 다량 확보할 수 있었다.

세계 상위 그룹에 가까워지기 위해 계속해서 매진했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상당수가 한국을 후진국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한국에 방문하기 전부터 “피아노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되느냐, 스타인웨이냐, 독일제 스타인웨이냐, 미국제냐, 몇 대나 보유하고 있느냐, 몇년도 산이냐, 건반 무게가 몇 그램이냐“ 등 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때 대표적인 피아니스트 중 기억에 남는 연주자는 라두 루프(Radu Lupu), 조지 윈스턴(George Winston), 미켈레 캄파넬라(Michele Campanella), 크리스티안 지메르만(Krystian Zimerman) 등이 있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이종열 명장에게 남긴 존경과 감사의 메시지. ©이종열

이 중 지메르만은 자신의 피아노를 항공편으로 가지고 오는 연주자였다. ‘얼마나 못 미더우면 피아노를 가지고 올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지메르만이 연주할 피아노의 조율 상태를 확인하고 ‘원더풀‘을 연발하던 그때서야 무한히 행복함이 밀려왔다. 그런 조바심으로 자신을 연마한 결과, 독일의 세계적인 음반제작사 도이치 그라모폰의 마이클 파인(Michael Fine)은 “사랑과 정성이 듬뿍 들어 있는 훌륭한 피아노”, 지메르만은 “그레이트 아티스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나에게 “피아노 소리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는 말을 전했다.

조율 경력 50년, 대한민국 명장 제1호

나는 대한민국 피아노 조율 명장 제1호다. 명장이 되려면 같은 직종에서 20년 이상 종사한 자여야 한다. 명장 신청을 할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지만, 난 생각이 달랐다. 내가 진정으로 명장이라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는 보류하겠다고 했다. 미루고 미루다 조율 경력 65년 만에 명장의 자리에 올랐다. 명장이 돼서도 연구와 공부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나더러 주변에서는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다며 좀 편하게 여유를 갖고 지내라고 한다. 나는 늘 한결같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날이 많아진 요즘은 해외여행 때 수집한 책들을 꺼내어 끊임없이 복습하고 공부한다. 80세가 넘은 지금도 매년 노련함이 더해지는 비결이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꿈을 향한 이종열 명장의 노력은 명장이라는 결실로 돌아왔다. ©이종열

무대 조율사를 하다 보니 이상한 경험도 하게 된다. 피아노 조정 작업을 연주자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해서 맡겨보면 엉터리로 해놓고 하다 하다 결국은 작업 요청이 온다. 이탈리아의 미켈레 캄파넬라의 경우 전속 조율사가 오지 못하게 되어 내가 조율과 정음(음색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음이 있으면 지적해달라고 하고, 작업하는 동안 분장실에서 잠시 쉬고 있다가 작업이 끝날 무렵 와서 체크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냥 옆에 가만히 서서 모든 작업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겠다고 하더라. 그때 또 한 번 ‘한국 조율사를 믿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씁쓸했다. 나는 항상 유비무환의 태도를 유지한다. 언제, 어떤 요구를 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율을 잘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면 피아노를 고쳐주는 아저씨에 불과할 테지만, 나는 조율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소리가 힘을 갖추면 조율사가 감동하고 다음으로 연주자가 감동하고 끝으로 청중이 감동한다. 그 감동을 위해 지금껏 살아왔고, 이왕 하는 일이라면 한국의 피아노 조율 수준을 의심하며 오는 해외 연주자들에게 되레 놀람과 깊은 감동을 주고자 노력했다. 앞으로도 비록 작은 힘이나마 한국의 위상을 드높여 국위선양을 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얼마 전 TV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이종열 명장이 담담히 적어 내려간 이야기에 다시 한 번 감동을 경험한다.

앞으로도 이어질 소리의 마술사 이종열 명장의 활약이 기대된다.

조율사가 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 글을 읽는 젊은 세대에게 한 가지 일에 일생을 바칠 생각으로 전진해나간다면 꿈에 가까워지고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내 경험을 토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피아니스트들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

사진 이종열, 셔터스톡

모차르트 레퀴엠 중.
‘눈물과 한탄의 날’

이종열 피아노 조율 명장
1938년 전주에서 태어나 1956년 피아노 조율에 입문해 독학했다. 수도피아노사와 삼익피아노사를 거쳐 1980년부터 세종문화회관, KBS홀, 호암아트홀 전속 조율사로 근무했다. 1995년 예술의전당과 전속 계약 후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2007년 산업자원부 피아노 조율 부문 명장 제1호로 선정됐다. 저서로는 2011년에 출간한『피아노 보이싱』, 2019년 에세이 『조율의 시간』이 있다. 십수 번의 피아노 선진국 견학을 통해 기술 연마와 견문을 넓히는 데 힘써왔으며 다양한 방송과 언론 매체에 소개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