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POINT

예술의전당 아카데미 〈소소살롱〉 두 번째 이야기
한국의 전통 SF, 『임시조종사』

이자람 & 배명훈의 〈소소살롱〉
2.20(토) | 리사이틀홀

2020년 11월, SF 잡지 「오늘의 SF」 2호에 중편 분량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임시조종사』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 지하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시조종사 자리를 얻어 취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비행기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도 이틀을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산속 오지에서 지하임은 드디어 자신이 조종하게 될 사연 많은 로봇을 만난다. 하지만 바로 그 로봇으로 인해, 인종청소가 일어나는 비정한 국제 정세와 그것을 막기 위한 전쟁에 휘말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닌 판소리의 형식과 언어로 작성됐다. 즉, 내가 쓴 첫 번째 판소리 SF다.

SF와 판소리의 만남

SF가 꼭 판소리와 만나야 할 이유는 없지만 둘의 만남이 아주 이상하지만은 않다. 판타지가 가능한 곳에서라면 SF를 시도해보는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닌데, ‘드래곤’이 등장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게 판소리이니 내용상으로는 연결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스타일과 다루는 시간이다. 판소리가 전통 예술에 속하는 장르라면, SF가 대표하는 시간대는 주로 미래다. 둘은 현재를 경계로 완전히 분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이 둘을 연결하려면 우선 현재를 해결해야 하는 셈이다.

2020년 11월, SF 잡지 「오늘의 SF」 2호에 중편 분량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임시조종사’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 지하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시조종사 자리를 얻어 취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임시조종사』는 SF와 판소리가 만난 독특한 장르 소설이다.

소설 장르에서 현대는 근대라는 시간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현대의 소설가들은 ‘근대소설의 말’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쓰는데, 이 글투는 자연발생하거나 점진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근대화기라는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소설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이광수나 김동인 같은 작가들이 활동하던 시기다.
문제는 이 근대소설의 말이라는 것이 대단히 권위적이라는 데 있다. 작품 안에서 ‘서술자’는 진리나 윤리 문제를 판단하는 최종 결정권자다. ‘결국’ 사건의 전말이 무엇이었는지 단정 짓는 것은 서술자의 한마디인데, 그런 것치고는 이 목소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너무 구체적이고 인위적이다. 신의 목소리나 오래 전승된 예언처럼 베일에 가려 있지 않고 과정이 다 노출된 탓이다.

별문제 없으니까 다들 계속 쓰고 있는 것이겠지만, 소설의 주요 매질인 ‘근대소설의 말’은 불변의 진리라 여기기에는 어쩐지 불안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늘 이런 형태일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하필 ‘메이드 인 근대’라니, 멀쩡해 보여도 어딘가 한 군데는 아무도 눈치 못 챈 하자가 숨어 있을 법한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토대 아래에 뭐가 있었는지 기웃거리기로 했다. 거기에서 만난 것이 판소리의 말이다.
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SF 스토리를 판소리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작업이, 특이한 것과 특이한 것을 섞어서 더 특이한 것을 만들려는 기획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작업은 소위 ‘근대의 말’을 사용하지 않고 현대의(혹은 미래의) 삶을 담아내는 방법을 탐구하는 일에 가깝다. 우리가 아는 그 방식으로 근대가 진행되지 않았더라면 21세기의 창작자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었을까? 『임시조종사』는 이 질문에 대한 나만의 대답이다.

2020년 11월, SF 잡지 「오늘의 SF」 2호에 중편 분량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임시조종사’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 지하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시조종사 자리를 얻어 취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배명훈 작가는 근대소설 이전의 한국어로 SF 스토리를 담고자 했다.

다행히도 판소리에는 근대 이전의 말이 잘 보존돼 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어휘다. 일본이나 미국의 영향 아래 놓이기 전이므로 많은 단어가 한자어로 돼 있다. 이는 판소리의 말이 예스러운 느낌을 자아내는 원인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이전의 말에도 외래어가 꽤 도입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상어가 된 외래어와 멋으로 쓴 한자어를 구별할 수 있다면 ‘문자(文字)’를 쓰는 자리에 영어에서 유래한 표현을 넣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임시조종사』에는 “모닝 쓰리 이브닝 포(Morning three evening four)” 같은 영어식 사자성어를 넣었는데, 이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직역이다.

소설이 된 판소리의 언어와 장단

이보다 본질적인 판소리의 특징은 서술자의 역할과 위치다. 근대소설에서는 시점을 통일하는 것이 기본이다. 미술의 소실점 개념처럼, 독자가 세계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작품 안에서 일관되게 통일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판소리의 화자는 훨씬 자유롭다. 화자는 서술자가 되었다가 주인공 A가 되었다가 심지어 공연 현장에 있는 소리꾼이 되었다가 다시 주인공 B가 되기도 한다. 여기까지는 직접 써보기 전에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막상 이야기를 써나가면서 당혹스러웠던 점은, 문장이 좀처럼 종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심코 ‘-다’로 끝나는 문장을 여러 개 써놓고, 정말로 이렇게 끝이 나는지 사설을 들여다보니 역시나 그렇지 않았다. 판소리의 문장 종결은 다소 특이하다. 흔히 아는 만연체도 아니고, 문장이 종결되는 지점이 대화 사이에 숨겨져 있다.

2020년 11월, SF 잡지 「오늘의 SF」 2호에 중편 분량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임시조종사’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 지하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시조종사 자리를 얻어 취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문장 또는 노래의 종결이 특이해 소설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판소리.

다음 문장을 보자. “소리꾼은 ‘판소리의 말을 배우려면 외국어를 공부하듯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현대소설의 문장을 판소리의 말로 바꿔 쓰면 “소리꾼이 말하길, ‘판소리의 말을 배우려면 외국어를 공부하듯 하는 수밖에 없느니라’”가 된다. ‘-라고 말했다’ 같은 표지를 넣지 않고 연기로 대사를 마무리해버리는 것이다. 시점을 넘나드는 화자의 문장 종결법은 서술과 대사를 조합하는 기술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대사는 종종 노래가 되므로, 문장의 종결은 노래의 종결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판소리를 쓰는 것은 이런 언어적인 규칙을 익히는 것으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결국 판소리는 노래이므로 장단을 익히지 않을 방법이 없다. 글을 절반쯤 썼을 때, 나는 장단을 고려하지 않고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장단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자 어휘를 영어식 표현으로 고칠지 말지는 언어적인 측면만 보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노래에 실렸을 때 발음이 자연스러운지도 함께 판단해야 한다. 장단도 마찬가지다. 문학적으로야 운율만 담아내면 그만이지만, 음악으로서 판소리 장단은 문학의 운율보다 훨씬 복잡하다.
따라서 『임시조종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최종 완성작이기보다는 (장차 만들어질 것으로 가정한 공연의) 원작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학 텍스트로 끝나지 않을 것을 지향했다는 측면이 그 하나고, 작창(作唱)하는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다는 한계 설정의 측면이 나머지 하나다.

2020년 11월, SF 잡지 「오늘의 SF」 2호에 중편 분량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임시조종사’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 지하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시조종사 자리를 얻어 취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배명훈 작가는 판소리의 장단을 배워 소설로 녹여냈다.

글이 공개된 후에 어느 독자에게서 들은 이야기에는, 이 글이 완성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담겨 있다. 장단이 들어 있는 글인 것 같아서 그렇게 읽었는데, 익숙하지 않은 어떤 장단은 텍스트를 읽는 것만으로는 머릿속에 재현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소설가에게 독자가 함께 가지 못하는 이 지점은, 더 나아가서는 안 되는 한계선이다. 노력해도 독자가 읽어내지 못한다면 더 가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무대에서 실제로 연주되는 장단에는 이 같은 한계가 없다. 청자가 침묵 속에서 상상할 필요 없이, 연주되는 소리는 연주한 대로 들린다.

나는 지금 내가 멈춘 지점이 부끄럽지 않지만, 언젠가는 내 글이 공연으로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 맞은편에서 귀인이 나타나 내가 놓은 다리의 나머지 반쪽을 완성해 ‘한국의 전통 SF’라는 이론상의 개념이 현실에서 정말로 구현되기를. 그러기를 바라며, 몇 년간 다듬어온 이야기를 담아냈다. 생각으로 조종하는 로봇에 올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웅장한 SF 모험담에, 꼬리가 두툼한 눈표범도 덤으로 한 마리 집어넣었다.

2020년 11월, SF 잡지 「오늘의 SF」 2호에 중편 분량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임시조종사’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 지하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시조종사 자리를 얻어 취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2020년 11월, SF 잡지 「오늘의 SF」 2호에 중편 분량의 이야기를 발표했다. ‘임시조종사’라는 제목의 이 이야기는, 로봇 조종술을 익힌 청년 지하임이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시조종사 자리를 얻어 취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소살롱> 두 번째 콘서트의 주인공 소리꾼 이자람(왼쪽)과 소설가 배명훈.

지금껏 써내려온 배명훈 작가의 이야기는 2월 20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리는 <소소살롱>에서 좀 더 상세히 풀어놓을 예정이다. ‘창작의 원동력, 예술의 에너지’를 주제로 소리꾼 이자람과 대화를 나눌 그 시간을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사진 예술의전당, 정은주

배명훈 소설가
2005년 SF 공모전에서 「스마트D」가 당선되며 데뷔했다. 「안녕, 인공존재!」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청소년 문학 『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 『가마틀 스타일』, 『푸른파 피망』, 단편소설 『안녕, 인공존재!』, 『예술과 중력가속도』, 『춤추는 사신』,연작소설 『총통각하』, 『타워』, 장편소설 『신의 궤도』, 『은닉』, 『청혼』, 『맛집 폭격』, 『첫숨』, 『고고심령학자』, 『빙글빙글 우주군』, 에세이 『SF 작가입니다』를 펴냈다.

이자람 & 배명훈의 <소소살롱>

기간 2021.2.20(토)
시간 2PM
장소 리사이틀홀
입장연령 8세 이상
관람시간 120분
가격 일반석 4만4,000원
주최 예술의전당
문의 02-580-1614